"우리나라의 많은 노조들이 현대자동차 노조만 쳐다보고 있는데 어떻게 파업을 안 합니까."

지난해 초 울산 현대자동차 노조 간부를 만나 "왜 매년 파업을 벌이느냐"고 묻자 그는 마치 자랑하듯 이같이 말했다.

부끄러움이나 주저하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강성 노동운동의 최대 '종가(宗家)'로서 체면도 있고 자존심도 있는데 강력한 모습을 보여줘야 되지 않겠느냐"는 투다.

현대차노조의 투쟁성을 만천하에 과시함으로써 노동계 내 헤게모니 싸움에서 주도권을 잡겠다는 얘기인 셈이다.

경제규모 세계 11위인 우리나라의 핵심사업장 노조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현상이다.



실제 현대차노조는 올 들어 11차례나 벌어진 민주노총의 총파업에 꼬박꼬박 참가했다.

한 달에 한 번꼴로 조합원들의 근로조건과는 아무 상관없는 정치파업에 매달린 셈이다.

또한 노조의 존립기반인 도덕성마저 도외시하고 있다.

지난해의 채용비리에 이어 최근에는 창립기념품 납품비리에 발을 담그는 등 모럴 해저드에 빠진 모습까지 드러냈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현대차노조에서 시작해 현대차노조에서 끝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현대차 노조는 투쟁의 덫에 걸려 있고 정치집단화한 지 오래다.

현대차 노조에는 10개가 넘는 계파가 있다.

조직 내에서 나름대로 영향력 있는 간부들은 '대권(위원장)'에 도전하기 위한 징검다리로 너도나도 '소공화국 격'인 계파를 구성한다.

계파에 속한 노조원들은 '우두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따로 분가해 또다른 소공화국을 만든다.

이러다 보니 조직 내 계파가 핵분열하듯 늘어나고 서로 다른 계파를 공격하기 일쑤다. 민주노동자회(민노회) 소속인 현 노조 집행부의 노조 창립기념품 납품비리 연루 사실이 드러난 12일 다른 계파인 전민투가 대자보를 통해 집행부 사퇴를 촉구하기도 했다.

민노회를 비롯 전임 위원장을 배출한 민주노동자투쟁위(민투위),실천하는 노동자협의회(실노회),민주노동자투쟁연대(민노투) 등 4~5개가 메이저 계파에 속한다.

위원장 선거 때만 되면 기성 정치인 뺨치는 선거운동이 벌어진다.

계파 간 서로 합종연횡하면서 새로운 '권력자'를 창출하는 데 몰두한다.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를 지지하고 다음 번 선거 때는 자신이 지지를 받는 형태의 품앗이도 성행한다.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를 빗댄 "동네 개만도 못한 짝짓기를 서슴지 않는다"(이수호 전 민노총위원장)는 비난이 현대차노조에 더 어울린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대차노조는 이제 정상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할 수 없는 '병든 조직'이다.

노조 스스로 개혁의 칼날을 댈 상황을 벗어났다.

민주노총의 총파업투쟁이 벌어지면 선봉에 서는 곳이 바로 이 노조다.

회사의 생산성이나 조합원들의 근로조건은 뒷전으로 한 채 투쟁의 나팔이 울리기만을 기다린다.

문제는 현대차노조의 무책임한 집단행동이 우리 경제를 멍들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차노조는 올해 11번 파업을 벌였고 이 때문에 모두 1조5907억원의 손실을 입었다.

파업 이유도 다양하다.

노조원들의 임금 인상을 비롯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협상,비정규직법안,노사관계 로드맵 등 온갖 이슈에 간섭한다.

환율 하락과 세계 자동차시장 침체로 경영환경이 날로 악화되지만 현대차노조는 관심 밖이다.

"회사가 망해야 정신을 차릴 것"이란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노조 간부들은 오로지 권력을 어떻게 하면 잡을 수 있는가만이 관심사다.

계파들이 벌이는 주도권 다툼에서 '이기느냐,지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현대차 노사관계는 이미 회사 차원의 노무관리를 넘어선 상태다.

만약 노조 집행부가 파업을 자제한다면 이 조직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노동부 관계자는 "아마도 다른 계파의 거센 공격 때문에 당장 노조위원장을 비롯한 전 집행부가 사퇴해야 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파업중독증'에 걸린 노조가 회사의 경영사정을 걱정해 파업을 자제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도 없다.

어제는 이라크 파병 때문에,오늘은 노사로드맵 때문에,내일은 한·미 FTA협상 때문에….온갖 이유를 갖다대는 민주노총의 총파업에 개근하는 현대차노조는 구실이 없어 파업을 벌이지 못할 정도다.

박영범 한성대 교수(경제학)는 "현재차 노조는 투쟁을 최고의 선으로 삼는 것같다"며 "앞으로 합리적인 노사관계가 정착되려면 투쟁 일변도의 노동운동을 자제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기설 노동전문기자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