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임덕 부담감수, 정국정상화 위한 결단
정치현실 수용..국정운용 기조변화 주목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27일 전효숙(全孝淑) 헌법재판소장 지명을 철회한 것은 레임덕(권력누수) 가속화라는 정치적 부담을 떠안더라도 경색정국을 정상화시켜 더 이상의 국정 표류를 막아야겠다는 정치적 결단의 성격이 강해 보인다.

지명철회가 상징하는 통치권자의 인사권 훼손이 임기말 레임덕을 가속화할 개연성이 농후하지만, 이보다는 정국 교착의 원인인 전 후보자 인준 문제를 '결자해지' 방식으로 해소하면서 국정의 정상화를 도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상황인식이 우선했다는 해석이다.

참여정부가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공들여 추진해온 사법.국방개혁안과 국민연금법 개정안 등 각종 민생.개혁법안이 여야간 정쟁에 매몰돼 이번 정기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하고 방치될 경우 주요 개혁입법이 좌초되는 것은 물론, 국정운영의 추동력마저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임기를 1년여 앞둔 노 대통령으로선 레임덕 현실화의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정국파탄이라는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선'을 택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당초 청와대는 노 대통령이 제안한 '여.야.정 정치협상회의'를 한나라당이 수용할 경우, 협상 테이블에 전 후보자 문제를 포함한 정국현안을 모두 올려놓고 일괄타결을 시도한다는 방침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전 후보자 인준표결에 필요한 민주, 민노당 등 군소 야당을 협상 상대에서 배제했다는 점에서 청와대와 여당에는 퇴로까지 닫아놓은 '배수진'인 셈이었지만, 한나라당이 이를 거부하는 바람에 선택할 수 있는 카드를 상당부분은 잃는 결과를 낳았다.

노 대통령은 야당을 상대로 한 '버티기'냐, 아니면 표결강행을 통한 정면돌파냐는 기로에 섰고, 결국 '전효숙 카드'를 버리는 특유의 반전을 택했다.

정치권에서 '백기투항'이라는 평가도 하지만, 결국 다른 정치력을 발휘할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의 '외길 선택'이라는 해석도 있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여야간 협상이 꽉 막힌 상황을 해소하면서 앞으로 여야가 협의를 통해 문제를 풀어나기 위한 조치로 본다"고 말했다.

'전효숙 카드' 포기는 국정 파트너인 한나라당과의 대화정치 환경을 조성하고, 이를 통해 국정운영의 안정성을 담보하겠다는 기대도 깔려 있다.

시기적으로 '여.야.정 정치협상' 제안과 관련해 한나라당이 "청와대가 스스로 풀라"며 결단을 촉구한 뒤에 전효숙 카드철회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노 대통령이 야당의 요구를 수용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청와대는 전 후보자 지명 철회가 한나라당이 정치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윤태영(尹太瀛) 대변인은 '지명 철회가 정치협상 개최의 돌파구로 작용할 것으로 보는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정치협상회의의 취지와 정신은 살아 있고, 유효하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교착정국의 원인인 전 후보자 문제에 대해 한나라당 요구대로 따랐으니 이제는 한나라당이 성의를 보일 차례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문제는 청와대의 기대대로 한나라당이 '양보와 타협'에 응할지는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당장 한나라당은 "전효숙 지명철회는 정치협상회의와는 별개라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선을 그었고, 한발짝 더 나아가 '전효숙 카드' 철회를 계기로 노 대통령의 레임덕을 가속화시키기 위해 정국운영 드라이브의 강도를 높일 태세이다.

한나라당 내에서 벌써부터 전 후보자 문제와 관련해 전해철(全海澈) 민정수석과 박남춘(朴南春) 인사수석의 경질이 거론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노 대통령의 대화 제의를 마냥 거부하기 어려울 것이란 관측도 있다.

전 후보자 지명 철회가 국정운영의 한 축인 한나라당에 공을 넘긴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노 대통령의 이번 조치는 한나라당의 대화 거부로 국정 표류가 지속될 경우 한나라당도 비판여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노 대통령이 버렸는데, 그래도 한나라당이 반대만 한다면 국민 앞에서 옹졸해지는 것 아니냐"며 "한나라당이 일단 국회에서 여야대표간 협상을 한다고 한 만큼 국회의 상황을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청와대 기대대로 정국 교착 상태가 타개된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에게는 사실상 인사권만 남아 있다"는 청와대 관계자의 표현처럼, 야당의 강공 드라이브에 떠밀려 대통령의 인사권마저 야당에 '저당'잡히는 상황이 전개됨으로써 국정 장악력의 일정한 이완은 불가피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또 노 대통령의 이번 결단은 그동안 견지해왔던 원칙과 소신 관철보다는 정치적 현실 수용이라는 점에서 향후 대통령의 국정운용 기조가 일정하게 변화할 것이라는 관측도 여권내부에서 제기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김재현 기자 jah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