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발령 문제 맞물려 불씨 살아 있어

아나운서협 "퇴직하면 당분간 출연 못해" ‥ PD들은 "제작 자율권 침해 말라" 반박

아나운서가 프리랜서를 선언한 후에도 기존 프로그램을 계속 맡는 것은 바람직한 일인가.

이들은 '아나운서'인가 단순한 '방송 진행자'인가, 그것도 아니면 '연예인'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인가.

프리랜서를 선언한 아나운서의 기용 문제를 놓고 KBS 아나운서팀과 프로그램 제작 PD들이 최근 심각한 의견 대립을 보이면서 '프리랜서 아나운서'의 정체성 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특히 KBS는 '프리랜서 아나운서' 문제가 공영방송이라는 특수성과 지역순환근무제 문제와 맞물려 홍역을 치렀다.

논란은 KBS의 인기 아나운서인 강수정, 김병찬 두 아나운서가 잇달아 사표를 제출하면서 시작됐다.

강수정 아나운서는 DY엔터테인먼트라는 연예기획사와 계약을 하면서 지난달 31일 KBS 아나운서직을 관뒀고, 김병찬 아나운서는 1일 KBS청주방송총국으로 발령이 난 뒤 7일 사표를 제출했다.

두 사람이 프리랜서 신분으로 기존 프로그램을 계속 진행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이냐를 두고 아나운서팀과 제작 PD들이 전혀 다른 시각을 보이면서 본격적으로 문제가 불거졌다.

아나운서협회는 7일 사내게시판에 올린 '스타 아나운서의 프리랜서화를 경계한다'는 제목의 글을 통해 "몇 년 전 경영진과 아나운서실은 KBS 아나운서의 프리랜서 선언시 일정기간 기존 진행 프로그램을 맡을 수 없도록 하는 방침을 세운 바 있고 이는 아직도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협회는 "스스로 키운 아나운서를 고비용으로 다시 쓰는 행태는 재정적 위기로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라며 "'KBS 아나운서'의 자리를 내려놓는 순간 KBS 아나운서로 누렸던 프리미엄도 함께 놓고 가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숙명여대에서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를 맡고 있는 강성곤 KBS 아나운서는 "공영방송의 이념을 지키는 차원에서 1TV는 광고를 받지 않는데 정작 일부 프로그램에서는 상업적 광고 이미지로 도배된 이들이 아나운서라는 이름으로 출연하는 것은 잘못이다.

CF를 통해 큰 금액을 받는 이들은 공영방송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공영방송의 진행자 정체성 문제에 대한 견해을 밝혔다.

이와 관련, KBS아나운서협회와 KBS노동조합 아나운서지부는 23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빌딩에서 '공영방송 진행자의 역할'이라는 주제의 포럼을 열고 관련 사안을 논의하는 자리를 처음으로 마련할 예정이다.

하지만 시청률과 청취율 때문에 매일 '전쟁'을 치르는 제작 PD들은 아나운서팀과 전혀 다른 생각이다.

아나운서팀의 요구는 제작 자율권 침해라는 것이다.

예능팀의 한 PD는 "같은 비용을 들인다면 더욱 효율적인 선택을 할 수 있으며, 프리랜서가 이런 조건에 맞으면 쓰는 게 당연하다"면서 "아나운서팀이 여러 경로를 통해 제작진에 이런 식으로 압박하는 것은 불공정한 일"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아나운서팀에서는 팀내의 다른 아나운서를 쓰라고 하지만 솔직히 대신 기용할 만큼 능력 있는 사람이 없다"면서 "평소 예능 프로그램에 아나운서를 기용하려면 이런저런 이유로 까다롭게 거절을 해 오다가 막상 예능적인 교육을 소화한 프리랜서를 쓰려니까 반대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영방송 진행자 정체성 문제와 관련해 또 다른 한 PD는 "공영방송 아나운서가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한다고 해서 그것이 아나운서의 위상을 추락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아나운서의 영역을 넓히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는 "시청자의 이익과 공익성 부합 여부를 고려해 판단해야 할 문제"라며 "사실 제작진이 그렇게 특정 프리랜서에 집착하는 이유도 의문이지만, 아나운서 쪽도 스스로 키워 놓은 사람에게 덜미를 잡히는 등 우스운 꼴을 당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나운서팀이 평소 공영방송인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해 조직의 규율과 책임의식에 대한 관리를 소홀히 한 듯하다"며 "또 PD들이 제기하는 제작 자율권 문제도 프로그램 내용이나 편집이 아닌 진행자 범주까지 주장하는 것은 확대해석하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이번 '갈등'은 김병찬, 강수정 아나운서가 기존에 맡았던 KBS 1TV '사랑의 리퀘스트'와 KBS 2TV '연예가중계' '무한지대 큐'에서 각각 하차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대신 강 아나운서는 오락 프로그램 '해피선데이'의 한 코너만을 계속 맡게 됐으며, 라디오 '강수정의 뮤직쇼'에서의 거취 문제는 아직 마무리되지 못했다.

특히 김병찬 아나운서의 퇴직은 KBS 본사 아나운서의 지역순환근무제와도 일정 부분 엮인 것으로 알려졌다.

오래 전부터 퇴직 의사를 밝혀오던 김 아나운서가 지방발령 인사가 취해진 후 결심을 완전히 굳혔기 때문이다.

KBS 본사에는 아직 지역순환근무를 소화하지 못한 '스타 아나운서'가 6명이나 있다.

앞으로 이들도 차례로 지방근무를 해야 한다.

KBS 아나운서팀의 한 관계자는 "프리랜서로의 유혹에 늘 노출돼 있는 이들이 만약 마땅한 프로그램을 맡지 못한 상황에서 지방 발령까지 받게 되면 퇴사를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스타 아나운서'의 퇴사문제와 프리랜서 아나운서 기용 문제는 앞으로 KBS가 인사 철마다 겪을 수 있다는 '살아 있는 불씨'라는 의미다.

(서울연합뉴스) 김영현 기자 cool@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