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홍색 드레스를 걸치고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을 지르며 무대에 나타난 카르멘은 전혀 예쁘지 않았다.

다리를 쩍 벌리고 가슴을 쭉 편 그녀는 눈을 내리까는 법이 없다.

굳이 꽃으로 비유하자면 도도하고 풍성한 모란꽃일까.

명색이 발레인데 우아한 사랑의 몸짓은 없고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시가를 피워 대며 폭풍 같은 열정을 쏟아내는 카르멘만 거기 있다.

소심한 청년 호세와 능글맞은 투우사 에스카밀리오를 마음대로 요리하는 카르멘은 마치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 같은 야생의 여인이다.

스웨덴 출신 '안무계의 이단아' 마크 에츠가 파격적으로 재해석한 '카르멘'이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지난 24일 저녁 서울 예술의 전당.배우들이 툭하면 무대에서 시가를 피워 대는 통에 객석까지 연기가 흘러들어왔지만 관객들은 모두 홀린 듯 무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카르멘'은 배우에게도,관객에게도 충격적인 작품입니다.

시가를 물고 발레를 추다니요.

'카르멘' 이후의 한국 발레는 그 이전과 다를 수밖에 없다고 봐요." 이 무대의 주역을 맡은 발레리나 노보연씨(28)의 단언이다.

노씨는 '카르멘' 이전까지 '불운한 발레리나'로 불렸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고 2001년 국립발레단에 입단해 솔리스트로 활동했지만 기량에 비해 배역 운이 따라 주지 않았기 때문. 스타로 발돋움한 김주원씨 등의 그늘에 가렸다. 국내 공연에서 주역을 맡은 것은 지방 공연을 포함해 이번이 세 번째.

"원하던 배역을 따지 못할 때는 정말 속상했어요. 그럴수록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지요." 그래서일까. 올해 봄 전체 단원을 대상으로 한 오디션에서 카르멘 역으로 발탁된 후 노씨는 석 달 동안 쉬는 시간에도,단체 연습이 끝난 후에도 연습을 계속했다.

"몸이 너무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내게 너무 좋은 기회가 왔으니까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죠."

'카르멘'으로 그녀에 대한 평가는 달라졌다.

김주원,영화 '셸 위 댄스'의 쿠사카리 타미요와 트리플 캐스팅됐지만 개·폐막일을 포함해 총 5일 중 3일을 노씨가 주연으로 공연할 정도로 인정받았다.

세계적 안무가 마크 에츠는 노씨를 "정말 표현력이 풍부하고 기량이 뛰어난 아름다운 댄서"라고 극찬했다.

박인자 국립발레단장도 "노보연은 인물에 대한 해석력이 좋다"면서 "앞으로 국립발레단에서 컨템포러리 발레(현대 발레) 부문을 키우기 위해 꼭 필요한 배우"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천상 춤꾼이다.

'ㄴ'과 'ㄹ' 음절이 우아하게 이어지는 발레리나보다는 '춤꾼'이라는 표현이 그녀에게 어울린다.

사실 얼굴이 둥글고 키가 작은 노씨의 신체는 발레리나로서 최상의 조건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다른 발레리나에게 없는 개성과 파워,독특한 매력이 있다.

클래식 발레보다는 현대 무용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카르멘은 남성들에게 전혀 기죽지 않는 당당하고 강한 여자예요.

다소 야할 수 있는 연인과의 성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장면에서도 그녀는 천박하지 않아요.

자신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여성의 긍지를 유지하고 있죠."

클래식 발레 위주로 활동해 온 그녀가 카르멘이 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여섯 살 때부터 22년 동안 해 온 발레의 기본 자세,등을 곧게 펴고 어깨를 내리는 자세를 버리라는 요구가 가장 힘들었어요.

아무리 버리려고 해도 습관처럼 발레의 걸음걸이가 나오는데 참 막막하더라고요.

시가를 물고 있기는 또 어찌나 힘이 드는지.숨막혀 죽을 것 같은 데도 계속 뛰어다니며 춤을 춰야 하니까요."

노씨는 카르멘 역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발견'했다고 표현했다.

"안무가들이 가장 강조한 것이 '연기력'이에요.

완전히 다른 내가 되는 느낌을 배웠죠.앞으로도 개성이 강한 역할을 더 해 보고 싶어요." 국립발레단의 '심포니인C와 카르멘' 공연은 오는 28일까지 예술의 전당에서 볼 수 있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