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말 도쿄 중심부 마루노우치 거리에 위치한 법무법인 태평양 도쿄사무소.영화배우 박용하씨 매니저로부터 급히 도움을 청한다는 내용이 담긴 팩스가 들어왔다.

약속 장소에는 일본 콘서트대행업체와 일본여행사 일행이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10월14일 하와이 와이키키 쉘에서 예정된 박씨의 콘서트 건 때문이었다.

박씨의 일본 여성팬 1000여명이 3박4일 일정으로 여행할 계획이었는데 그동안 구두합의를 토대로 준비를 진행하는 바람에 마무리 단계에서 몇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부인 아베 아키에씨가 열렬팬이기도 한 박씨의 콘서트 자체가 조그만 실수로 자칫 무산될 수도 있는 위기에 봉착한 것.천만다행으로 일본 유명 엔터테인먼트 업체로부터 태평양 소속 이후동 변호사(42)를 소개받아 콘서트를 무사히 치를 수 있었지만 박씨측으로서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이 변호사는 "한류 붐을 타면서 한국과 일본 업체 간에 특히 엔터테인먼트 관련 계약이 급증하였는데 계약 내용을 보면 법률적인 허점이 적지않다"며 "그런데도 일본에서 한국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미국 중국 다음으로 국가 간 인적·물적 교류가 많은 나라 일본.그러나 법률시장에 관한한 일본만큼 먼 나라도 없다는 것이 일본 내 한국인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5개의 로펌이 나가있는 중국과는 달리 일본에 진출한 국내로펌은 태평양 1곳뿐이라는 것이 단적인 예다.

태평양은 1996년 국제적인 네트워크 구축을 목표로 중국과 일본 등지에 소속 변호사를 유학보냈다.

당시만 해도 자의반타의반 식으로 떠밀려간 변호사들은 10년 만에 각국의 언어를 습득하는 것은 물론 현지 법조인들과도 탄탄한 인맥을 쌓아 각국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해 놓고 있다.

한국로펌의 해외진출 1호인 태평양 도쿄사무소가 개설된 때는 2002년 4월.하지만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국내 다른 로펌들도 일본시장에 대한 입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성과는 없었다.

"리스크가 크기 때문입니다." 이후동 변호사의 분석이다.

중국이나 베트남 등의 경우 아직 법률적인 체계가 자리잡히기 전이어서 변호사의 조력을 끊임없이 필요로 하지만 일본 같은 선진국의 경우 비즈니스가 안정화돼있어 법률 수요도 적고 따라서 비용을 넘어서는 수익을 장담할 수 없다는 얘기다.

상담건수가 월 30건 정도라는 이 변호사의 업무도 상당 부분이 일본기업과 국내 본사를 연결시켜주는 가교 역할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렇지만 일본에 진출한 국내기업과 재일교포들 입장에서는 국내 로펌과 변호사의 존재가 절실하다.

특히 재일교포의 재산상속 등 국제사법상 준거법(적용법)이 국내법인 경우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한국과의 거래를 늘리고 싶어하는 일본 변호사들에게도 국내 로펌이 아쉽기는 마찬가지.지한파로 제2도쿄변호사회 부회장을 역임한 오카모토 게이이치로 변호사는 "한국 변호사가 모자란다"고 말한다.

그는 "예컨대 비자갱신을 할 때도 자격이 없는 한국의 행정서사들이 나서서 법률시장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았다"며 국내 변호사의 역할을 강조했다.

재일교포를 상대하는 일본 변호사들도 간혹 있긴 하지만 한국말이 서툰 데다 한국에서 재판을 진행시킬 능력이 없다는 평가다.

일본기업의 투자 유치에도 국내 로펌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굳이 한국으로 가지 않더라도 상담에서부터 계약 체결까지 일괄 처리가 가능해 태평양을 파트너로 택했다"는 일본 기업이 늘고 있다.

지난 7월 설립된 닌텐도코리아가 대표적인 사례.올 한해에만 야마사,포케몬 등 여러 회사들이 자회사 설립 혹은 그와 관련된 법률자문을 의뢰해왔다. 사법연수원 관계자에 따르면 3년여 전에 설립된 일본법학회가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향후 일본에 진출할 잠재적인 변호사들이 하나둘 늘고 있는 셈이어서 양국 간 법률 교류의 전망을 밝혀주고 있다.

도쿄=김병일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