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짓다 <동사> 1.재료를 들여 밥,옷,집 따위를 만들다.

2.….'(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옷을 짓는다는 것은 말이죠…."

디자인 철학에 대해 묻자 정구호 제일모직 상무(44)의 입에서 맨 처음 나온 한마디.국어사전에 '1번'으로 올라 있는 평범한 용법이지만 어쩐지 머리를 울리는 신선함이 느껴졌다.

자신의 이름을 딴 여성복 브랜드 '구호(KUHO)'의 책임 디자이너인 그에겐 패션 디자인이란 '집을 짓는' 것처럼 사람을 위한 또 다른 공간을 창조하는 일을 의미했다.

20~30대 고학력·전문직 여성들이 화려한 해외 명품 브랜드를 마다하고 모노톤의 색상에 단순해 보이기만 하는 구호의 옷에 열광하는 것은 이 같은 정 상무의 독특한 디자인 철학 때문.그는 여느 패션 디자이너처럼 색상,소재,디테일 등에 매달리지 않는다.

대신 구조적 완결성,깊이감,실루엣 등을 따져 '옷이라는 입체'를 만드는 일에 집중한다.


때문에 '구호'의 옷은 유행을 잘 타지 않고 입기 편안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면서도 입는 이를 지적이고 세련되게 표현해준다.

패션 트렌드를 앞장서 이끌지도,그렇다고 뒤따라가지도 않으려는 이들이 구호를 찾는다.

정 상무가 '구호를 가장 멋지게 입는 여성'으로 꼽은 영화배우 장미희씨는 "옷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을 명품으로 만들어 주는 브랜드"라고 평했다.

구조적으로 안정된 건축물을 설계하는 듯한 디자인 스타일을 형성하게 된 데 대해 그는 "패션 디자인을 전공한 적이 없다 보니 그 쪽에서 통용되는 어떤 공식 같은 것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 상무는 미국 휴스턴대를 거쳐 1989년까지 뉴욕의 파슨스 스쿨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했다.

학교를 마친 뒤 뉴욕 타임스에서 잠깐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다 그만두고 뉴욕대 앞에 한식당을 내기도 했다.

이후 뉴욕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동하다 한국에 왔다.

1997년 서른 다섯살의 나이에 뒤늦게 패션 디자이너의 길에 뛰어 들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던 일이어서"가 대답의 전부다.

서울 청담동에 '구호' 매장을 열고 봄·가을 꼬박꼬박 패션쇼를 열었다.

그의 의상은 특유의 절제된 스타일로 단숨에 패션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한국형 미니멀리즘의 탄생'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패션 디자이너가 된 지 2년 만에 최고 권위의 'SFAA(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 컬렉션'에 초대되기도 했다.

1998년 영화 '정사',1999년 '텔미썸딩'의 의상 디자인을 맡은 데 이어 2003년엔 35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스캔들'의 의상 디자이너 겸 아트 디렉터로 대종상까지 탔다.

국내 최대 패션기업 제일모직은 2003년 '구호'를 사들여 여성복 부문 주력 브랜드로 삼았다.

당연히 그도 함께 데려와 상무 자리를 주고 책임 디자이너로 앉혔다.

경력이 말해주듯 '천성이 자유인'이라는 정 상무가 '비용,성과,이익'의 함수로 움직이는 대기업에 들어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패션 디자이너가 대중과 폭넓게 대화하는 길은 '잘 팔리는 옷'을 만드는 것입니다.

부티크에서 소수 고객을 위한 옷을 만드는 것을 넘어 대기업이 갖고 있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통해 구호를 대중적인 브랜드로 키워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서죠." 한 해 매출만 200억원이 넘는 기업형 디자이너 브랜드의 수장이 되고나니 타협해야 할 것도 적지 않았다.

처음엔 디자이너로서 "이런 옷은 반응이 썩 좋질 않으니 다른 걸 만들어 달라"는 영업 파트의 요구를 선선히 받아 들이기가 쉽지 않았단다.

정 상무는 그러나 "지금은 고객과의 광범위한 접점을 갖고 있는 대기업이 패션 디자이너와 대중 사이에서 보다 효율적인 소통을 매개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디자이너 정구호'의 작업에 대한 대중으로부터의 피드백을 즉각,그리고 정확하게 돌려주는 시스템이 갖춰졌다는 얘기다.

차기현 기자 kh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