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용이라니요.

노사평화를 통한 회사의 실익이 곧 조합원의 실익 아닌가요."(이강춘 동국제강 노조사무국장)

동국제강 유니온스틸 동부제강은 노사 분규 무풍지대라는 공통점을 안고 있다.

이들은 10년 이상 노사평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동국제강과 유니온스틸은 올해 노사협상도 지난 3월 일찌감치 끝내버렸다.

각각 13년,12년 연속 무분규 타결이다.

동부제강도 지난 10일 11년째 무분규로 올해 노사협상을 매듭지었다.

3개사 모두 노조가 협상을 회사측에 위임한 무교섭 타결이다.

이들 3개사도 과거 노사분규의 진통이 없지 않았다.

강성 노조의 이름 아래 장기간 파업에다 공장라인을 세우는 조업 중단이 예사였고 때론 폭력으로 얼룩졌다.

보다 못한 회장이 눈물을 보였는가 하면 거래선 대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맛봐야 했다.

이들 3개사가 노사 무분규를 이끌어낸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고(故) 장상태 회장의 눈물

동국제강은 노조가 설립되기 이전부터 파업의 소용돌이를 거쳐야 했다.

1980년이었다.

당시 '사북사태(석탄회사에서 발생한 대규모 노사분규)' 여파로 주력인 부산 용호동 공장이 폭력으로 얼룩진 파업사태를 겪었다.

동국제강 관계자는 "고 장상태 회장은 당시 눈물을 떨구며 파업 자제를 호소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후 1987년 동국제강 노조가 설립됐으며 1991년에는 10일간 준법파업에 또 휘말려야 했다.

상당한 생산 차질과 경영 악화가 초래됐다.

그러나 이 파업은 오히려 신노사 문화로 전환하게 된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파업과 같은 극한 대립이 결코 실익이 없다는 점을 노사가 공감하게 된 것이다.

이강춘 동국제강 노조사무국장은 "어용노조라는 비난이 견디기 힘들었으나 노사가 맞서지 말고 회사의 성장과 실익이라는 한 방향을 보자면서 이를 극복했다"고 말했다.

이런 공감대 아래 동국제강 노조는 1994년 항구적 무파업을 선언했다.

사측에서는 답례로 사원아파트를 마련해 주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사원복지 혜택을 부여했다.

현재는 매월 임원단 회의인 '책임경영회의'에 노조위원장을 참여시켜 회사의 주요 경영 안건에 노조의 의견을 반영하고 있다.

사무직이 파업깃발 들어

동국제강의 계열사인 유니온스틸은 더 했다.

1980년부터 1993년까지 거의 해마다 쟁의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동국제강의 유니온스틸(당시 연합철강) 인수를 둘러싸고 사무직이 먼저 파업의 깃발을 드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1988년부터 1989년까지 연합철강은 최장 307일간의 조업중단 사태를 치러야 했다.

회사 위상은 바닥으로 추락했고 대부분의 거래선이 떨어져 나갔다.

1994년 노조는 마침내 "매년 이대로 가다가는 노사 모두 죽는다"면서 손을 내밀었다.

임금 인상안을 회사측에 백지위임했다.

회사측은 이에 분기별 '오픈 미팅(Open Meeting)'을 실시,경영정보를 공유하는 등 화답하고 있다.

가사불이(家社不二) 문화로 극복

동부제강의 경우도 하루아침에 11년 무분규 전통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에 걸친 정성의 결과다.

1990년 초 강성 노조가 주축이 된 파업으로 조업이 중단된 것은 물론이고 연간 노사교섭 일수가 평균 110일에 이를 정도로 노사대립은 극심했다.

동부제강 관계자는 "당시 경영진이 정상적인 경영활동에 전념할 수 없을 정도로 비효율적이고 소모적인 투쟁 일변도의 노사관계였다"고 말했다.

게다가 "1조3000억원에 달하는 대규모 충남 아산만 공장 투자를 앞두고 있었기에 사운이 걸린 시기였다"고 덧붙였다.

동부제강 노사는 이를 전환의 계기로 삼았다.

1995년 노조가 무파업,무재해,무결함의 3무(無) 운동을 결의하면서 신뢰의 노사관계를 구축했다.

1996년에는 항구적 무파업을 결의했다.

대전제는 '가사불이(家社不二)'였다.

직장이 곧 노조원의 가정이라는 노사문화를 만들어 냈다.

사측에서는 노조전담 '공장 총괄 임원 제도'를 도입했다. 노사가 언제나 대화할 수 있는 창구를 개설해 열린경영,투명경영을 실행하고 있다.

김홍열 기자 com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