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디지털TV 업체인 디지털디바이스는 월드컵 특수를 누려 보지도 못한 채 경영권을 인수·합병(M&A) 전문업체에 넘겼고 MP3플레이어 1위 업체 레인콤은 2분기 연속 적자를 내자 비상 경영을 하고 있다.
수년 전에는 삼보컴퓨터 현주컴퓨터 등 중견 컴퓨터 업체들이 쓰러졌다.
세원텔레콤 텔슨전자 등 승승장구하던 중견 휴대폰 업체들도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왜들 이러는가.
디지털 기기 시장에서 중견 기업은 구조적으로 살아 남을 수 없는 것인가.
한국에서만 이러는 것인가.
중견기업 위기가 끊임없이 반복되자 정보기술(IT) 업계에서는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말이 나온다.
인구 4500만명의 좁은 내수 시장이 '죄라면 죄'라는 것.시장이 좁다 보니 한때 잘나가다가도 대기업이 뛰어드는 순간 벼랑으로 몰린다.
위험을 무릅쓰고 해외로 나갔다가 다국적 기업의 '한 방'에 나자빠지기도 한다.
VK가 그렇다.
이 회사는 처음부터 내수 시장에 매달리지 않았다.
삼성 LG보다 먼저 중국 정부로부터 휴대폰 생산·판매 라이선스를 따내 성공했다.
그러나 중국이 휴대폰 시장을 개방하자 유럽 미국으로 나가야 했다.
VK가 '칼'을 맞은 것은 이 즈음이다.
노키아 모토로라 등이 저가 공세를 펼치자 한순간에 코너로 몰렸다.
중견 디지털TV 전문업체들이 월드컵 특수가 예상됐던 때 위기를 맞은 것도 내수 시장이 좁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내수 시장이 크면 대기업이 시장을 흔들어도 중견기업 몫은 남는다.
하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디지털TV 수요가 불붙는 시점에 대기업이 마케팅에 돈을 쏟아붓자 소비자는 대기업 제품으로 눈을 돌렸다.
그 결과 디지털디바이스는 M&A 전문기업 CCG에 경영권을 넘겼다.
지난해 10월 LCD TV 사업에 뛰어들었던 3S디지털은 단계적으로 TV 사업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이에 앞서 지난 3월에는 우성넥스티어와 덱트론이 대주주 지분을 팔아 LCD TV 사업을 축소하거나 포기하고 폐기물 처리와 2차전지 개발 등에 뛰어들었다.
중견기업이 갖는 '태생적 한계'도 있다.
중견기업은 변화에 민첩하게 대처하기엔 '몸'이 제법 무겁다.
중소기업 시절 시장이 전쟁터로 변하기 전 털고 일어서던 습성은 둔해졌다.
반면 대기업에 맞서 싸우기엔 힘이 달린다.
대량 생산을 통해 단가를 낮추는 '규모의 경제'를 기대하기도 어렵고 애프터 서비스에서도 밀린다.
수년 전 중견 휴대폰 업체 세원텔레콤과 텔슨전자가 쓰러진 경우가 그렇다.
세원이나 텔슨은 주로 중국에 휴대폰을 수출해 돈을 남겼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수백 개,수천 개 기업이 휴대폰 시장에 뛰어들었고 급기야 도저히 이익을 내기 어려운 지경이 됐다.
그러나 미처 수출 시장을 다변화하기도 전에 파국이 닥쳤다.
그렇다면 단순히 내수 시장이 좁기 때문일까.
중소기업처럼 민첩하지 못하고 대기업만큼 자금력이 강하지 않기 때문일까.
IT 업계는 또 다른 요인을 꼽는다.
디지털 기기의 경우 가격과 기술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끝없는 가격 하락과 '컨버전스(융합)' 추세에 대처할 줄 알아야 살아 남을 수 있다는 얘기다.
한때 세계 MP3플레이어 시장을 주도했던 레인콤이 곤경에 처한 것도 이런 경우다.
레인콤은 MP3플레이어 하나로 2004년 매출 4540억원을 올렸다.
제품이 단순해 언젠가는 곤경에 빠질 수 있다고 예상했지만 위기는 예상보다 빨리 닥쳤다.
레인콤이 MP3에 빠져 있는 동안 삼성전자 LG전자 등은 휴대폰에 MP3플레이어 기능을 넣었다.
이에 따라 굳이 MP3플레이어를 살 필요가 없어졌다.
이를 간파한 중소 경쟁사들은 재빨리 MP3플레이어에 이동멀티미디어방송(DMB),휴대용멀티미디어재생기(PMP) 등의 기능을 결합한 컨버전스 단말기를 내놓았다.
레인콤은 IT 분야에선 '졸면 죽는다'는 말이 정설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따지고 보면 국내에는 아직 디지털 기기로 중견기업 굴레를 벗고 글로벌 기업이 된 사례가 거의 없다.
팬택계열이 매출 4조원대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노키아 모토로라 등의 가격 공세에 밀려 고전하고 있다.
IT업체 한 관계자는 "기회가 있을 때 시장 변화에 대비하지 못한 중견기업 잘못이 크지만 이런 문제를 해당 업체 문제로 국한시키면 디지털 산업의 뿌리가 흔들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산업 내에서 전문화를 도모해 대기업 중견기업 중소기업이 공생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형호 기자 chs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