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 평양시 평천구역 안산동 보통강 호텔. 손전화 850 2 381 ****. 그의 명함을 받아든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북한 국가번호 850이었다.

팩스 대신 '확스'라고 쓴 이질적인 표기보다도 한국에선 회선이 차단돼 신호가 가지 않는 그 번호가 첫 눈에 설었다.

나이젤 카위는 평양에 11년째 살고 있는 영국인 금융가다.

서울 HSBC에 근무하던 1995년 홍콩 금융회사 페레그린이 현지 대성은행과 합자로 대동신용은행을 만들 때 스카우트돼 행장을 맡았다.

방문차 서울에 온 그를 광화문에서 만났다.

녹음기를 켜자 순간 불안한 표정이 그의 얼굴을 스쳐간다. 그는 변명처럼 "외국인이라도 북한에서 사업한다고 말하기가 조심스러웠던 게 불과 몇 년 전"이라고 하더니 "사회가 많이 바뀌었다. 이제 할말을 하고 북한에 대한 고정 관념을 불식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은 북한의 불법 활동을 잡기 위해 대북 제재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합법적인 수출입상들"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지난해 9월 미국이 북한의 주요 무역금융망이었던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은행을 블랙리스트에 올렸을 때 동결된 북한 돈 2400만달러 중 600만달러는 대동신용은행을 거쳐 나간 북한의 교역 자금이었다. 카위 행장은 설탕이나 조미료를 수입하고 소량의 송이버섯을 수출하는 무역상들이 상당 기간 자금난을 겪었고,지금도 해외 사업을 하기가 불편하다고 말했다.

"우리 은행 입장에서도 시간과 자금의 낭비가 커졌다. 외국과 거래할 때 한 은행에 돈을 몰아 넣기가 불안해져서 여러 나라에 새 계좌를 계설하고 자금을 분산시키기 위해 출장을 여러번 다녀와야 했다. 다른 북한 금융 기관도 상황이 비슷했다. 해외 은행이 북한과의 직거래를 기피하고 북한 돈이라면 위폐가 아닐까 의심부터 하는 경우도 생겼다. 지난 2월에 몽골로 100만달러와 2000만엔을 수송하다 위폐로 의심된다는 이유로 몽골 공항에서 돈을 압수당했다. 결국 깨끗한 돈이라는 게 밝혀졌지만 돌려받는 데 14일이 걸렸다."

대동신용은행이 북한의 무역금융에서 하는 역할은 대금 결제를 돕는 것이다. 카위 행장은 북한에는 국제 금융 시스템이 없고 북한 원화가 외국 돈과 태환이 안 되기 때문에 무역금융이 일어나는 방식이 다른 나라와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다.

대동신용은행은 무역상들이 가져온 달러를 외국에 있는 그들의 거래선으로 송금해주거나,때론 달러를 직접 싸가지고 나가 전달해주기도 한다. 그는 북한의 무역금융망이 이같이 국제 기준에서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미국의 대북 제재가 북한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파악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카위 행장을 포함,북한과 교역하는 외국인 대부분은 미국이 북한에 가한 금융 제재의 의도와 효과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북한의 불법 활동을 근절하는 게 목적이라면 이들을 정조준해야 하나 미국의 금융 제재에는 합법적인 것과 불법적인 사업을 구분할 수 있는 장치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카위 행장은 북한이 2400만달러에 연연해서 6자회담 출석을 거부하고 있다는 '바깥 세상'의 추정에 대해 "2400만달러 중 내가 주인을 정확히 모르는 돈은 1000만~1500만달러 정도다. 설사 북한 당이나 군부 돈이라해도 (회담을 거부할 이유가 될 만큼) 큰 액수는 아니다"며 공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그 돈을 돌려받는데 집착하는 게 아니라 외국과의 거래에서 겪는 불편함을 면제받기를 바란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지난 3월 북한 외무성의 리근 부국장이 워싱턴에서 미 재무부 관리들을 만나 미국 은행에 미화로 결제하는 북한 계좌를 개설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던 것에 주목한다. 카위 행장은 "미국이 그 요구를 들어주면 북한이 2400만달러를 당장 못 받아도 6자회담에 나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북.미 관계가 악화 일로에 있는 것과 달리 북한과 유럽연합(EU) 간의 관계는 2002년 이후 다양하게 확대되고 있다. 2004년 스위스가 평양비즈니스스쿨 설립을 도왔고 독일 사업가가 e메일과 인터넷서비스를 하는 KCC유럽을 설립했다. 독일계 평수제약,네덜란드 검역회사 CIS그룹,영국 에너지 기술업체 스파이렉스 사코가 평양에 있는 대표적인 외국계 기업이다. 이들은 지난해 4월 평양 유럽비즈니스협회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하지만 지금도 북한에 상주하는 외국 기업인은 12명 정도로 많지 않다.

카위 행장은 "평양 내 외국인은 모두 합법적인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강조하며 "우리는 북한을 보는 많은 고정관념과 편견을 불식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외국인으로서 느끼는 불편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북한이 다른 여느 나라와 많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한다. "생활이 좀 단조로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 사람들은 외국인에게 관대하고 친절하며,평양은 나무가 많고 깨끗해서 살기 좋은 도시다. 밥은 대체로 내 사무실이 있는 보통강호텔에서 먹는데 한식과 일식의 맛이 아주 좋다."

정지영 기자 cool@hankyung.com


[ 대동신용은행은... ]

대동신용은행은 북한에 있는 유일한 유럽계 은행이다. 홍콩 금융회사 페레그린이 현지 대성은행과 합자로 1995년 설립했다. 페레그린은 1998년 아시아 금융 위기 때 자금난에 빠져 대동신용은행 지분을 청산했으며 이 지분을 카위 행장과 홍콩에 거주하는 유럽 투자자들이 인수했다. 현재 대성은행과 외국인 간 지분비율은 3 대 7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