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이 대거 연루된 이른바 `동백림 거점 북괴 대남적화공작단' 사건 당시 서독에서 항의집회가 잇따른 가운데 주독 한국대사관이 점거되고 태극기가 나치스 표식으로 모독당한 일도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사실은 30일 외교통상부가 공개한 동백림사건 외교문서에 따르면 주독대사관 침입.난동사건이 발생한 것은 1968년 12월5일 오후 9시(현지시간). 김영주 주독대사가 독일 각계인사 16명을 초청, 만찬을 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40여명의 독일 학생이 동백림사건 피고인들을 "석방하라"고 외치며 난입한 것. 우리측은 즉각 독일 경찰에 긴급연락하고 독일 외무성에도 통고했지만 최초 출동한 경찰관은 달랑 2명이었다. 그 후 경찰관이 한두명씩 증원됐지만 200여명으로 불어난 데모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주독대사관은 "약 40분간 대사관은 완전히 데모대의 폭력에 맡겨진 상태였다"라며 "경찰이 50명으로 늘어나자 데모대를 축출할 수 있었다"고 보고했다. 이날 데모대는 대사관 내에 들어와 만찬 식탁 위에 올라가고 기물을 파손하는가 하면 공관 간판에는 `붉은 뼁기칠'을 해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공관 밖에서도 투석도 이뤄졌다. 물적 피해만도 미화 400달러를 넘었다는 게 대사관 집계다. 만찬에 초대된 독일 국회의원 한 명은 처음에는 시위대에 설득으로 맞섰지만, 여의치 않자 완력을 쓰다가 일부 격투까지 벌어지면서 머리에 타박상을 입었다. 주독대사관은 6일 오전 독일 외무성에 경찰의 늑장출동을 꼬집고 "문명국가의 국민으로서 꿈도 꿀 수 없는 행위"라며 재발방지를 요구했고 독일측은 사과한다는 말을 포함해 유감의 뜻을 표했다. 당시 독일측은 늑장출동에 대해 "하등의 정치적인 이유가 없고 행정적 능력의 부족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본 경찰서장도 12월7일 대사관을 찾아와 해명했다. 독일측은 물적 피해를 보상하겠다고도 했으나 김 대사는 "제반사정을 고려한 결과 보상을 거부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본부에 건의했다. 우리 외무장관은 주독대사관 직원들의 침착한 대응과 노고를 치하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공교롭게도 12월5일 동백림사건 피고인들에 대한 서울고법의 재항소심 판결이 나온 것과 때를 같이해 일어났다. 당시 판결은 독일측 기대를 크게 벗어나면서 "놀랐다"는 반응이 나왔다. 이렇듯 독일내 시위는 주로 동백림사건에 대한 구형이나 선고 결과가 나올 때 심해졌고 양국 간 관계도 재판 상황이나 우리 정부의 조치에 따라 출렁였다. 앞서 8월 슈레스비히-홀슈타인주(州) 키엘시(市)에서는 국기모독사건도 있었다. 김 대사가 슈레스비히-홀스타인주의 행사에 참석한 것과 관련, 한국 대사를 행사에 초청한 주정부의 처사 등에 항의하는 좌익학생 주도의 집회가 있었고 이 때 학생들이 태극기에 나치스 표식을 붙여 게양했다는 현지 신문의 보도가 나온 것이다. 우리 대사관은 즉각 외무성에 진상 규명을 의뢰했다. 외무성측은 유감을 표하며 재발방지 약속은 물론 해당 학생에 대한 사법처리 용의도 표하면서도 독일 당국의 소홀한 점은 없었다고 해명했다. 몰지각한 일부 학생의 소행이라며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슈레스비히-홀슈타인주의 유감 표명 공문을 받은 뒤 종결됐다. (서울=연합뉴스) 정준영 기자 princ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