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논현동 강남이지치과 원장실에 들어서자 책상 뒤편 '2000년 이지영'이란 사인이 담긴 폭포수가 떨어지는 유화 한 점이 눈에 띈다. 옆 벽면엔 십자가, 차트와 서류가 이리저리 널린 책상. 영락없이 의사로서의 권위가 느껴진다. 그러나 컴퓨터 모니터엔 음악 사이트 홈페이지가 열려 있다. 서너 평 남짓된 이 공간은 치과의사 출신 가수 이지(본명 이지영ㆍ34)의 이중생활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흰 가운 차림의 이지와 마주한 지 5분도 안돼 그의 웃음, 말투, 제스처에서 시원 털털한 성격이 간파된다. "여기자분이라고 방심해서 제가 화장도 안 했네요" "제 외모와 체격이랑 목소리가 안 어울리죠 호호호" "1집 때는 부모님(아버지는 한국해양대학교 국제경영학부 교수, 어머니는 부산 MBC 아나운서 출신)이 영국에, 2집 때는 호주에 계셔서 그때마다 딸이 음반을 낸지 몰랐답니다". ◇대중음악계 편입 어려워 2003년 그는 서울대학교 치의예과 출신 가수로 언론을 장식했다. 동대학원에서 석ㆍ박사 과정을 마쳤고 서울대병원 치주과 레지던트, 을지의과대학병원 치과 과장을 역임한 후 현재 강남이지치과 원장으로 재직중이다. 큰 눈이 인상적인 외모로 '지성과 미모에 가창력까지 삼박자를 갖췄다'는 평가로 단숨에 관심을 끌었다. "데뷔 초기 의사라는 배경 때문에 관심을 끌긴 쉬웠지만 금방 식더군요. 의사 출신이어서 오히려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평가절하 시선에 속상했습니다. 음악으로 인정받기 힘들자 대중음악계에 편입하기가 녹록지 않더군요." 그가 잠시나마 경험한 연예계는 어떤 곳이었을까. 겸손함을 갖게 해준, 자신을 돌아보는 값진 시간이었다. 또 1집이 큰 반응을 얻지 못한 것은 그가 30여 년을 살면서 처음으로 느낀 좌절이었다. "사실 전 치과 의사치곤 괜찮은 코스를 밟았어요. 하지만 방송사 가요 프로그램에 출연할 때 톱스타와 달리 여느 신인가수와 함께 좁은 대기실을 사용하며 가요계에서 제 위치를 새삼 확인했죠. 전 무대를 옮기자 일궈놓은게 없는 무명이자 신인에 불과했습니다." 김원희 등 주위 친분 있는 연예인들이 있었지만 그 속으로 파고든 후 연예계 적자생존의 치열함도 몸소 체득했다. "여러 스타 지망생의 살아남기 위한 경쟁을 보면서 '뜨는' 연예인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의사 세계보다 더 치열했어요. 제가 의사란 배경 때문에 쉽게 관심을 끈 데 대해 무명으로 오랜 시간 노력한 분들에게 미안함마저 들더군요." 의료계에선 '의사로서의 권위가 떨어져 신뢰감을 잃게 된다'는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이에 본업에 충실하고자 오전 10시~오후 7시 진료 시간엔 활동을 피했으며 의료계 세미나에도 더 열심히 참석했다. 또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의료계 봉사단체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에서 무의탁 노인 진료, 청각장애인을 돕는 단체인 '사랑의 달팽이'에선 정책 회의, 노래 봉사 활동을 하고있다. ◇크로스오버 음악 하고파 일회적인 이벤트성 데뷔일 거라 생각했지만 이지는 3년 만에 2집 '마이 페이버리츠(My Favorites)'를 냈다. 재미교포 친구가 프로듀싱한 1집은 자신의 음색과 맞지 않는 노래였다고 판단, 2집 타이틀곡 선정에만 3~4개월이 걸렸다. 타이틀곡 '아파도 사랑합니다'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를 홀로 사랑하는 한 여자의 가슴 시린 사랑 이야기. 녹음하며 감정을 살리기 힘들어 수 차례 공을 들였단다. "사실…. 지금껏 한번도 사랑을 못해봤어요. 보통 가수들은 사랑의 경험을 노래에 토해내는데 전 녹음을 통해 '이런 게 사랑이구나' 하고 감정을 흡수했답니다."(웃음) 도도한 외모와 달리 그의 음색은 섬세하고 로맨틱하며 감성적이다. 어린 시절 합창단 등의 활동을 하며 성악 창법을 배워 고음에선 소프라노의 음색이 배어나온다. 소프라노 조수미의 '나 가거든(If I leave)'을 리메이크한 것도 크로스오버 장르에 대한 남다른 관심 때문이다. 이밖에도 히트곡 제조기 김도훈이 작곡하고 빅마마의 신연아가 작사한 '친구에게', 1집 노래를 왈츠풍의 서정적인 슬픈 멜로디로 편곡한 '소무', 직접 작사한 '어 데이 드림(a day dream)' 등을 수록했다. "1집을 낸 이후 의사들 회식 자리에선 '노래를 불러달라'는 제의가 쏟아지더군요. 반대로 가요 프로그램 대기실에선 가수와 매니저들이 노래에 대한 궁금증보다 치아 상담을 원했어요(웃음). 2집으로는 의사라는 장벽을 뛰어넘어 의사가 낸 아마추어 음반이란 선입견을 씻어내고 싶습니다." 여성 대통령이 되겠다는 그의 꿈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여느 아이들이 가졌던 어린 시절의 꿈이었을 뿐이다. 정치엔 관심도 없고 정치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다"며 "여성 대통령은 무슨…"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mimi@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