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원 LA한미은행장은 1962년 광주일고를 졸업하자마자 미국에 유학온 '조기 유학생'이다. 당시 손에 쥔 돈은 100달러가 고작."선진국의 경제학을 배워서 지지리도 가난한 우리나라를 잘 살게 해보자는 게 조기유학을 결심한 배경이었다"고 한다. 플로리다주립대를 3년 만에 졸업하고 피츠버그대에서 2년 만에 박사과정을 밟을 때도 그의 꿈은 금방 이뤄지는 듯했다. 그러나 웬걸.박사 논문 지도교수였던 머리나 휘트먼이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경제보좌관으로 발탁되면서 한국으로 돌아오려던 그의 계획도 어긋나고 말았다. 논문 통과 막바지에 백악관으로 자리를 옮긴 휘트먼은 미안했던지 "논문이 완성되면 한부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후 논문을 받아본 그는 손 행장의 능력에 탄복,"백악관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이래서 얻게된 명함이 '백악관 경제자문회의 이코노미스트'다. 1973년부터 2년 동안 백악관에서 일하면서 그는 월가를 알게 됐고 그린스펀 전 FRB 의장과 친분도 쌓았다. 손 행장은 1974년 노웨스트은행 부행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코노미스트 겸 은행원 생활을 시작한다. 백악관을 그만둘 무렵 데이비드 록펠러 체이슨맨해튼은행 회장이 직접 노웨스트은행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를 추천했다고 한다. 아무리 조그만 은행이라고 하지만 29세인 신출내기 은행원한테 부행장 자리를 주는건 어쩌면 모험이었다. 그후 그는 노웨스트은행이 웰스파고은행과 합병되면서 웰스파고은행 수석부행장 겸 수석 이코노미스트로 자리를 옮긴다. 이 과정에서 그는 월가의 '족집게 이코노미스트'로 이름을 알렸다. 경제적 큰 사건이 발생할 경우 미국 언론이 가장 먼저 찾는 이코노미스트가 됐다. 한때는 그린스펀 전 FRB 의장이 금리를 바꿀 때 그의 의견을 구한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지난 2001년엔 블룸버그통신이 선정한 '가장 정확한 경제예측가 5명' 중에 뽑히기도 했다. 작년 1월 미국 내 교포은행 중 가장 큰 한미은행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은행장으로 일하면서도 별도의 경제전망 사이트(www.drsohn.com)를 운영하며 틈틈이 경제전망 세미나 등을 개최할 정도로 이코노미스트의 역할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