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줏빛 등산복에 회색모자….트렌디한 패션이었지만 낡은 갈색 등산화에선 소박함이 묻어났다.


"이거? 내가 타이어 사장을 시작한 81년에 두 켤레를 샀지.낡아 보여도 수제화야.이번엔 타이어 사장한테 부탁해서 스노타이어 고무를 밑창에 댔더니 더 좋아졌어."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그룹 회장은 지난 21일 청계산 산행에 동행한 기자에게 '등산화' 자랑으로 말문을 열었다.


시산제를 겸한 주말산행은 오세철 사장을 비롯한 금호타이어 임직원과 전략경영본부 임직원 100여명과 함께 청계산 초입 원터마을에서 매봉을 돌아 내려오는 3시간 코스.



선두에서 말없이 한 걸음씩 내딛던 그는 옥녀봉에서 금호타이어 임직원들의 시산제가 끝나자 이야기 보따리를 조금씩 풀어 놓기 시작했다.


"우리가 올해 60년인 데 나도 작년에 환갑을 지냈거든.조물주가 60이란 숫자에 의미를 부여한 것 같아.뭔가 새로운 것을 시작해야 된다는…."


금호아시아나는 올해 대우건설 대한통운 인수에 총력을 다할 태세다.


지난주 대우건설 예비입찰에도 참여했다.


기존 사업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면 인수하겠다는 박 회장의 의지는 단호했다.


"올해 우리가 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일이 있지.성장하고 도약하기 위해서는 꼭 해야 돼.열 번 구애하면 넘어온다는 말처럼 열 번 찍어서 안 넘어 가는 나무가 있겠어.대한통운은 우리가 하면 잘 할 수 있을 걸로 생각해서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있어.하반기에 (인수전)시작되면 잘 해야지."


박 회장은 대우건설 인수전에 뛰어든 이유로 금호산업과의 시너지 효과를 첫번째로 꼽았다.


"금호산업이 지난해 시공능력평가에서 9위를 했는 데 그 전 해엔 17위였지.상당한 실적이야,남들도 열심히 안 했겠어.영업이익률은 우리가 사실상 최고거든.대우건설은 해외에서도 강하니까 인수한다면 국내외에서 차별화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거야."


인재 확보에 대한 욕심도 강하게 내비쳤다.


"솔직히 말해서 건설회사는 사람이야.누굴 시켜서 대우건설 사람들의 능력을 알아보라고 했는 데 회사도 좋지만 사람들 능력도 최고인 것 같아.나는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의 인재들을 꼭 사고 싶어."


대우건설 인수전에 유진 프라임 대주 등 중견그룹들이 뛰어들면서 경쟁이 치열할 것 같다는 기자의 지적에 박 회장은 "내가 1조원하면서 5조원하는 기업을 먹겠다고 하면 우리 직원들이 어떻게 보겠어"라고 반문했다.


중견그룹의 외형성장에 대한 지나친 욕심에 일침을 가하고,우량 기업은 제대로 된 주인을 찾아야 한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M&A는 인수 기업이나 피인수 기업 모두에게 장기적인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얘기다.


박 회장은 대우건설 인수가 어려울 경우를 묻자 "현대건설도 좋은 회사가 아니냐.관심을 갖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이어 2006년은 금호아시아나의 해외 사업이 완전히 자리를 잡는 해가 될 것으로 자신했다.


중국 베트남 필리핀 등의 사업 구상을 밝히는 그의 목소리엔 한층 힘이 실렸다.


"해외 출장을 다니다 보면 삼성 LG 현대와 같은 한국기업 브랜드가 도처에 깔려 있어.참 자랑스러워.그런데 그때마다 '우린 언제 해보나'라는 생각이 들었지.어떤 때는 화가 나기도 했어.그런데 이젠 우리도 중국을 중심으로 금호의 깃발을 펄럭일거야.한번 지켜봐."


박 회장은 그룹의 글로벌화 첨병으로 160개국에 제품을 수출하고 있는 타이어를 꼽았다.


중국에서 지난해 난징공장을 확장한 데 이어 톈진에 제2공장을 오는 6월 완공하고 창춘에도 제3공장 착공을 앞두고 있다.


"IMF 때 톈진공장을 매각했었지.당시엔 아쉬움도 많았는 데 지금 돌이켜보면 참 잘했어.새 공장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설비를 갖췄거든.옛 톈진공장은 설비 수준이 뒤떨어졌었는 데 이젠 중국에서도 최고의 품질을 내놓지 않으면 승부하기 어려워.렌터카도 지난해 베이징에서 영업을 시작했는 데 개인보다는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장기 렌트 서비스를 다른 도시로 확대시킬 거야."


산행을 함께한 오세철 금호타이어 사장은 2009년엔 세계 9위,2012년엔 세계 5대 타이어 메이커가 될 것이라고 화답했다.


금호아시아나는 중국과 함께 베트남에서도 본격적인 사업을 벌인다.


지난해 허가를 얻은 호치민 요지의 주상복합 프로젝트인 '아시아나 플라자'는 상반기 중 착공에 들어간다.


베트남에 타이어 공장을 건립하는 일도 차근차근 추진하고 있다는 게 박 회장의 설명이다.


"베트남은 중국과 달리 이제 막 경제개발을 시작한 곳인데….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시장이야.우리에게 새로운 기회가 많이 열릴 것 같아."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이 있지만 지난해 극심한 조종사 파업을 겪은 아시아나항공은 박 회장이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계열사다.


10년간 사장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파업 당시 마음이 어떠했는지 궁금해 물었지만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뭐 안타까웠지.그게(파업) 없었더라면 항공은 물론 그룹 전체적으로도 실적이 더 좋았을 거야.지난 얘기니까 그만 하지 뭐.다 내가 부족한 탓이겠지 뭐.내 잘못이야…."


그러면서도 아시아나항공 주가가 최근 6년 만에 공모가(7500원)를 넘어서기도 했던 데 대해서는 흐뭇함을 감추지 않았다.


"당시에 1만1000원인가 하자는 걸 내가 더 많은 사람에게 주식이 돌아가야 한다면서 우겼었는데…. 그 이후 장이 안 좋아져서 여러 사람들한테 너무 미안했지 뭐."


한국프로골프협회장을 맡고 있는 박 회장은 골프 예찬론자로 잘 알려져 있다.


누구나 골프를 칠 수 있는 날이 빨리 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금호타이어 현장 직원들 중엔 골프 치는 사람들이 많아.그만큼 대중화됐다는 얘기지.그런데 아직도 골프가 귀족 스포츠로 인식되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야." 박 회장은 올가을 문을 여는 금강산 골프장에서 유명 골퍼들을 초청해 대회를 열기로 애머슨퍼시픽측과도 얘기가 오가고 있다고 밝혔다.


언제 가장 기업하는 보람을 느끼느냐는 질문에는 "직원들이 나를 반겨줄 때"라고 웃으며 말했다.


"나도 사람인 데 정말 반겨주는지 알 수 있잖아.오늘처럼 직원들하고 어울리는 날이나 해외에서 우리 직원들이 정말 반겨준다고 느낄 때 가장 보람있어.이게 기업하는 맛인가봐."


하산길이 막바지에 이르자 박 회장은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먼저 내려간 '식구'들이 기다린다는 이유였다.


"한국 기업 역사가 100년도 안 되는데 이병철 정주영 두 분을 참 존경하지.김우중 회장도 더 평가 받을 수 있는 분이었는 데.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창업회장님(고 박인천 회장)을 가장 존경해.기업은 더 크게 못 하셨지만…."


기자를 뒤로 하고 서둘러 내려가고 있는 박 회장의 뒷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보였다.


류시훈 기자 bad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