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의 '산업정책 읽기'] 숫자의 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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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4월께면 미국 워싱턴DC에서는 대통령이 요구한 다음 회계연도 예산안 개요와 함께 연구개발(R&D) 예산을 분석하는 모임이 열린다. 그 자리에서 질문하는 이들을 보면 그가 민주당 성향인지,공화당 성향인지 대충 구분이 가능할 정도로 이런저런 의견들이 쏟아진다. 이 모임을 주최하는 미국과학진보협회(AAAS)는 의회에 대한 영향력이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도 이런 모임이 필요할 때가 된 것 같다.
정부가 예산과 기금을 합쳐 올해보다 6.5% 늘어난 221조4000억원의 내년 예산안을 내놨다. 기획예산처는 이번 예산에 대해 성장동력과 양극화 해소에 중점 투자키로 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성장보다 분배에 치우쳤다는 논란은 여전하기만 하다.
기획예산처가 성장동력에 역점을 뒀다고 하는 근거는 재원배분 설명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R&D 예산이 15%나 증액된 9조원 수준으로 늘어났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복지ㆍ보건 분야의 10.8% 증가와 대비되고 있다. 한마디로 R&D 예산 증가는 성장동력이 배려됐다는 결정적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숫자의 마술'같은 느낌도 없지 않다. 비슷한 규모의 분야들이라면 증가율 비교의 의미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R&D 예산이 9조원으로 늘었다고는 하지만 사회복지ㆍ보건 예산 54조7000억원에 비하면 6분의 1에 불과하고, 그 예산비중은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당시 공약한 7%에도 훨씬 못미치고 있다. 전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 자체가 크게 다르다는 점이 간과돼선 안된다는 얘기다.
R&D 예산 15% 증가도 기획예산처 말대로 과연 '획기적인 확대'라고 할 수 있을지 따져 볼 점들이 있는 것 같다. 2700억원의 국채발행 덕에 R&D 예산 증가율이 15%를 기록했지만 이를 제외하면 12%로 떨어진다. 문제는 이 2700억원을 확보할 수 없어 국채발행을 하느냐는 점이다. 국채발행 자체의 타당성을 떠나 과학기술 부총리가 그동안 국채발행을 끈질기게 요구했을 때는 이 정도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기획예산처가 생색내기용으로 R&D 예산을 이용하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가뜩이나 이번 예산을 두고 9조원에 이르는 적자국채 논란이 거센 점을 보면 특히 그렇다.
내년 R&D 예산은 8조9729억원이라고 하지만 재원이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도 살펴 볼 대목이다. 올해에 비해 58.6% 증가한 1조6860억원의 특정분야 사업을 위한 기금,그리고 12.6% 증가한 1조2106억원의 특별회계(특정세입으로 특정세출을 충당)가 모두 포함된 것이다. 들쭉날쭉한 기금과 특별회계를 제외하고 일반회계로만 따져 보면 R&D 예산은 올해보다 7.3% 증가한 6조762억원이다.
R&D 예산을 무조건 늘려야 한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기획예산처가 내년 예산이 성장동력에 역점을 뒀다는 상징으로 R&D 예산을 내세우는 것과는 왠지 괴리감이 느껴진다. 더욱이 과학기술혁신본부라는 새 행정체제가 출범한 이후 첫 R&D 예산이지만 이것이 던지는 대국민,대기업 메시지가 무엇인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고…. 미국의 AAAS처럼 R&D 예산에 대한 정례적인 분석과 토론의 장(場)이 더욱 아쉽게 느껴지는 이유다.
논설위원·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