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만 오래 있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학교를 벗어나기 두려워지는 '상아탑 증후군'이 생깁니다. 그래서 일단 산업현장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올초 충북대학교에서 전자통신 분야 석사학위를 딴 강지혜씨(24).박사과정 진학 허가를 받아두고 뜬금없이 벤처기업에 취직해 주변을 깜짝 놀라게 했다. 교수가 꿈이었던 강씨가 대기업이나 국책연구원도 아닌 벤처기업에서 일하겠다며 청주에서 분당으로 올라온 지 이제 4개월.현재 셋톱박스를 개발·생산하는 휴맥스의 연구소에서 근무한다. 대졸 취업난이 극심해지면서 대학원에 진학하는 젊은이가 늘어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확고한 의지를 갖고 학문 연구의 길을 택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대학에 남아 사회 진출을 미루는 경우도 증가한 것이 사실이다. "박사과정으로 유학을 갈 경우 5년 정도 걸리는데 어렵게 학위를 받아도 교수자리를 보장받기는 힘듭니다. 특히 인맥을 중시하는 국내에서는 더욱 그렇지요." 강씨가 상아탑을 벗어나 과감하게 휴맥스에 입사한 이유는 간단하다. 늘 실험실에서 연구하던 이론이나 가설이 현실 속에서는 어떻게 실현되고 구체화되는지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경험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점차 학교 연구실에 안주하는 스스로의 틀'도 깨고 싶었단다. 충북대 전기전자컴퓨터공학부(99학번)를 졸업하고 2003년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석사 2년 동안 남들은 몇 개도 쓰기 힘들다는 논문을 무려 10여개나 썼다. 아날로그부터 디지털까지 통신이론은 꿰고 있는 데다 도심에서 원활한 통신이 가능하도록 하는 다중간섭 제거 필터를 설계했고 압축코딩,통신용 인공지능 등도 연구했다. 한국전력과 공동으로 진행된 산·학 연계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휴맥스는 디지털홈네트워크에 관심이 많던 강씨가 인터넷에서 관련 정보를 찾기 위해 자주 들르던 회사였다. 신입사원 수시공고가 나온 것을 보고 바로 지원했다. 그의 인생에서 처음 써 본 입사지원서였다. 지난 5월 초 입사하자마나 유럽형 HD셋톱박스용 소프트웨어 개발에 투입된 그는 대학에서 쌓은 지식을 응용하고 제품으로 실현해내는 것이 마냥 신기하고 재미있단다. 강씨에 대한 회사측의 평가도 신입사원으로서는 이례적이다. 박태선 인사팀 차장은 "업무 적응력은 물론 일을 맡겨 보니 삼성 같은 대기업에 뺏길까 겁이 날 정도"라고 칭찬을 쏟아냈다. 강씨가 입사지원서를 낸 것은 4월 말.사흘 만에 1차 합격 통보를 받고 다시 이틀 후 실무진 면접을 치러냈다. 일대일 면접을 선호하는 이 회사에서 인터뷰 시간이 한 시간을 훌쩍 넘겼다. 그만큼 회사측에서 강씨를 탐냈다는 얘기기도 하다. 강씨는 "실무진 두 분이 꼼꼼하게 질문을 해 무척 긴장했지만 관심 분야와 전공 지식에 관한 것들이어서 솔직히 자신 있었다"고 회고했다. 임원면접은 3분 만에 간단히 끝났다. "고학점이나 높은 토익 점수보다는 꾸준히 한 분야에서 전문 지식을 쌓고 열심히 일하겠다는 강한 의지와 열의를 보여준 것이 회사측에 '어필'한 것 같아요." 곧 현장테스트를 위해 독일로 두 달간 장기 출장을 떠난다는 강씨는 "대기업이 연봉은 더 많을지 몰라도 아주 돋보이지 않으면 묻혀 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면서 "벤처기업은 개인의 특성과 장점을 발휘하기에 좋다"며 휴맥스 같은 중견기업 취업에 대한 평가를 했다. 그는 "내가 만든 셋톱박스가 전 세계로 팔려 나가니 회사의 미래를 바꿀 수도 있지 않겠느냐"며 "교수의 꿈을 미룬 것이 전혀 후회스럽지 않다"고 덧붙였다. 문혜정·김영우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