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가 대신 어학테이프 듣죠" ‥ GS칼텍스 여수공장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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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름 정유업계 초유의 파업사태로 홍역을 앓았던 GS칼텍스 여수공장. 파업이 끝난 지 1년여의 세월이 흐른 지난 19일 저녁 이 공장 복지동의 한 강의실에서는 우렁찬 중국어 '합창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루 일과를 끝낸 생산직 근로자 30여명이 중국어에 능통한 관리직 여사원을 강사로 초빙해 중국어 강의를 듣고 있었던 것.
이 공장에 때 아닌 중국어 배우기 열풍이 몰아분 것은 GS칼텍스가 향후 중국에 진출할 것에 대비해 조합원들 스스로 중국어 학습에 나섰기 때문.'고용안정은 노동조합이나 민노총이 아닌 스스로의 실력을 통해 확보할 수 있다'는 교훈을 지난 파업을 통해 얻은 그들이다.
'개인의 경쟁력이 회사의 경쟁력이고 회사가 잘돼야 나도 잘된다'는 인식으로 조합원들은 중국어 영어 일어 등 어학뿐 아니라 직무교육에도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GS칼텍스 여수공장 파업 종결 1년.그 사이 많은 것이 달라졌다.
조합원들의 얼굴에서는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공장의 담장을 무너 뜨리던 지난해 낯선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현장은 노조 활동보다는 업무에 대한 열의로 가득차 있었고 조합원들은 노동가요 테이프 대신 어학 테이프를 들으며 여가를 선용하고 있었다.
"파업 이후에 가장 달라진 점이라면… 글쎄요… 조합원들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됐다고나 할까요."(계기1팀 전양호씨)
전씨가 말하는 조합원들이 해야 할 일은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공장의 혁신활동과 업무개선에 힘쓰고 여가시간에는 자기 역량을 강화하는 것."민주노총에 가입돼있던 지난 4∼5년간에는 이같이 아주 기본적인 일도 '결국 자본만 배부르게 하는 일'이라는 이유로 사실상 금지당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정비2팀에서 근무하는 정영수씨는 "노조원 개개인의 실력향상은 생산성 향상을 가져오고 이는 구조조정의 가능성을 불식시키는 것"이라며 "지난해까지는 투쟁을 통해서만 구조조정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파업 이후 또 한 가지 달라진 점은 조합원들이 직무순환에 대한 거부감을 없앴다는 것.지난 1년간 200여명의 조합원이 생산라인을 바꿔가며 일했고 회사가 약 1조원을 투자한 수소첨가 중질유분해시설(HOU)에는 지원자가 경쟁적으로 몰렸다는 것이다.
파업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조합원들은 1년 전 파업 사태를 떠올리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민주노총의 '새빨간 거짓말'에 속아넘어 갔던 자신이 화가 날 뿐"이라고 입을 모았다.
"지난 2000년 민주노총에 가입한 후의 노조활동은 정치활동이지 조합활동이 아니었어요.
조합원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회사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이 노동조합의 진짜 할 일인데 말이죠.값비싼 수업료를 치렀습니다."(공무기획팀 윤성진씨)
조합원들은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와 민주노총의 끊임없는 음해성 선전에도 동요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이 벌이는 GS칼텍스 제품 불매운동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계기2팀 이종준씨는 "조합원들이 스스로 여수시내에 뿌려진 각종 불매운동 유인물을 수거해오고 주유소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고객들을 안심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사회 봉사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박주암 노조위원장 직무대행은 "최근 조합 내에 사회봉사부를 신설했다"며 "조합활동의 50%가 회사와 조합원들의 커뮤니케이션을 돕는 일이라면 나머지 50%는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 위원장은 "지난 1년간 조합원들은 과거의 관행에 대해 반성하고 어떻게 변해야 할지 스스로 깨닫는 시간을 가졌다"며 "22일부터는 새로운 노사관계 정립 프로젝트를 시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상생의 노사관계를 이루기 위해 회사와 노조가 어떤 일을 해야할지를 설문조사와 활발한 토론을 통해 구체화시켜나갈 계획"이라며 "3년 후에는 GS칼텍스만의 새로운 생산적 노사문화를 정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수=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