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2년 3월까지 도청이 이뤄졌다는 국가정보원의 '고해성사성' 발표가 나오면서 나라 전체가 충격에 휩싸였다. 과거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 이뤄진 도청자료 유출로 놀랐던 터에 불과 몇 년 전까지 이 같은 불법 도청이 자행됐다는 사실에 그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뿐이다. 이른바 '안기부 X파일'은 단순히 여야 정치권의 유·불리를 떠나 기업이나 시민들 사이에서도 누군가 엿듣고 있을 것이란 '도청신드롬'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국정원장 스스로 장관 시절 도청을 우려했다고 할 정도니 "지금은 절대 없다"는 정부의 설명이 먹힐리 없다. 국민적 의혹이 번져있는 만큼 진상규명을 위한 대대적 수사가 불가피하게 됐다. 수사 범위가 넓은데다 정치권도 이해관계를 내세우다 보니 단기간에 결과물을 내놓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당장 여권이 불법 도청 테이프 공개를 위해 추진중인 '제3기구'의 활동시한이 최장 6개월로 정해졌다고 한다. 야당이 모두 찬성하는 특별검사제법이 도입될 가능성이 적지않은데 특검법이 국회를 통과한다면 이 또한 시한이 적어도 과거 관례상 3개월 이상이 될 것이라는데 별 이견은 없는 것 같다. 여야 협의과정까지 포함하면 4~5개월은 족히 걸릴 것이다. 적어도 올 연말까지는 '과거 X파일' 문제로 허송세월할 게 뻔하다는 얘기다. 지난 한 해는 2002년 대선자금 수사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차떼기' 등의 용어가 새롭게 등장한 것도 바로 이 때다. 대선을 주도했던 인사들이 여야 할 것 없이 줄줄이 구속되고 정치권에 돈을 건넨 수많은 경제인들이 법정에 서는 '사법 드라마'가 이어졌다. 과거 논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여야는 지난해 말엔 과거사법을 놓고 정치판을 깰 듯한 기세싸움을 벌이며 시간을 보냈고 최근엔 열린우리당 김희선 의원 부친의 전력을 놓고 티격태격하고 있다. '과거'가 현재나 미래보다 더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쯤 되니 정치권 주변에서 "우리나라는 여전히 어두운 과거의 노예가 돼 있는 것 같다"는 자조섞인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미래를 얘기하고 준비해도 부족한 무한경쟁시대에 언제까지 과거에 발목이 잡혀 있을지 답답하기만 하다. 이재창 정치부 기자 lee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