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 감찰실장을 지낸 이건모씨는 28일 연합뉴스와 단독 인터뷰에서 "`미림' 팀장 공운영씨가 보관중이던 불법 도청 테이프는 모두 불태웠다"며 테이프 처리 경위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나 이씨는 "언제쯤인가 여러 정황으로 봐서 공씨가 우리에게 전량을 다 주지 않은 것으로 판단됐다. 전량 회수를 자신하지 못한다"며 미회수 테이프가 남았을 가능성을 시사해 진실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증폭되고 있다. ◇남은 테이프 있나 없나 = 일단 이씨가 회수한 불법 도청 테이프는 공씨가 `미림' 팀장으로 있으면서 제작해 빼돌린 것이다. 공씨와 전직 안기부 관계자 등이 최근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진술한 내용 등을 종합하면 `미림'이 재건된 뒤 4년여동안 제작된 불법 도청 테이프는 적어도 8천여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가 공씨로부터 회수해 폐기한 테이프가 200여개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하면 국민의 정부 출범 뒤 국정원내 보관 중이던 불법 도청 테이프를 전량 폐기했다하더라도 어디선가 이 테이프들이 일부라도 빼돌려졌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이씨는 연합뉴스에 보낸 자필 해명서에서도 "외부 상황에 대해서는 장담 못한다"며 도청 테이프의 잔존 가능성을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았다. 김영삼 정부 출범 후 해체됐던 `미림'이 2년여만에 재건된 것도 다른 테이프가 어디엔가 보관 중일지 모른다는 의혹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김 전대통령의 차남 현철씨와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이었던 이원종씨가 깊숙이 개입했던 의혹을 받고 있어, `대통령을 뺀 고위층은 모두 도청했다'는 공씨 주장이 전혀 사실무근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결국 이런 배경 속에 공씨처럼 정권 교체 뒤 언제 직권면직될지 모르는 불안감에 시달리던 직원들이 만약에 대비해 `보험용'으로 불법 도청 내용이 담긴 테이프 몇 개를 빼돌렸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천용택 전 원장 `빅딜설' 논란 = 이씨의 해명에서 주목되는 다른 부분은 천용택 전 국정원장 관련 내용이다. 이씨는 불법 도청 테이프가 유출됐다는 보고를 받고 공씨로부터 테이프를 회수한 뒤 천 원장에게 자료 분류 개요 정도만 보고했다고 한다. 천 원장은 그때 `알았다. 검토해봐라'라는 짤막한 지시 외에 더이상 묻지 않았다고 했다. 천 원장에게 테이프에 대해 접근하지 말라는 말도 했다고 이씨는 전했다. 그러나 전 정부의 치부가 고스란히 담긴 테이프를 국가정보원장이 입수 사실을 알고도 내용에 전혀 무관심했다는 설명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이와 관련해 국정원 퇴직 직원 모임인 `국사모'(국가를 사랑하는 모임) 회장 송영인씨는 26일 평화방송 라디오에 출연해 "공씨가 반납한 도청 테이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천 원장 등의 비리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고 주장했다. 테이프 유출과 관련해 천 원장 등 당시 정부 실세들 역시 자유롭지 못한 처지였기 때문에 불법 도청이나 밀반출 문제를 덮고 지나갔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이번에 유출된 도청 테이프에서 기아자동차 인수와 관련해 "삼성이 갖고 있는 복안을 당당하게 밝혀 공론화하면 당 정책위에 검토시켜 가능한 한 도와줄 것"이라는 발언을 한 사람은 이회창 후보가 아니라 김대중 후보측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테이프 매개 공씨 뒷거래 없었을까 = 공씨는 자해 소동을 벌이기 전 작성한 자술서에서 "조그만 구멍가게 수준의 사업을 하는데 과장돼 당혹스럽다. 통신가입자 유치 영업을 하면서 3년여동안 적자를 면치 못했다"고 주장했다. 직원 봉급, 사무실 임대로 등을 지출하고 나면 매월 몇백만원의 적자를 낸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씨의 설명은 조금 다르다. 공씨는 온세통신 시외전화 가입자 확보 사업을 했는데 동업자인 최모씨가 발이 넓어 국정원 등 관공서를 다니면서 주도적으로 영업을 했다는 것이다. 이씨는 퇴임 직원을 도와야 한다는 평소 신조대로 국정원내 독점업체의 양해를 구해 공씨와 이익을 조금 나누도록 도와줬다고 한다. 퇴임 직원들은 국정원의 관리 대상이라 일반 기업에서 접촉을 꺼리기도 하지만, 독점업체 양해를 구해 관공서를 상대로 집중 영업을 했다면 해마다 적자가 쌓였다는 공씨 진술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게다가 도청 테이프 유출 사실이 뒤늦게 발각되기도 했는데 어쨌든 국정원과 관계가 유지됐다는 점도 의문을 더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씨는 "문제가 불거지면 사회적 붕괴가 올게 뻔히 보이는 데 공씨를 어떻게 조사하고 처리하느냐"며 "천 원장에게도 `걱정말라. 내가 처리하겠다'고만 보고했다"고 공씨를 문제삼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서울=연합뉴스) 이광철 기자 minor@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