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 값 오름세가 심상치 않다. 지난해 10월 사상 처음으로 배럴당 50달러 선을 돌파한 미국 서부 텍사스주(州)에서 생산되는 원유 값은 7월 21일 현재 55달러 선으로 올랐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미국과 이라크 간 전쟁의 여파와 투기적인 수요 증가에 따른 일시적 상승이라는 분석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 들어서도 유가 급등세가 꺾이지 않자 국제 원유시장 구조상 유가의 고공행진이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중국을 비롯한 후발 개발도상국들이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하면서 원유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는 반면 원유 생산량을 늘릴 수 있는 능력은 한계에 이르렀다는 것. 이에 따라 국내에서도 유가 상승세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지난해 30달러대에 머물던 중동 두바이 산(産) 원유가 올 들어 50달러대로 오르자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두바이 산 원유는 우리나라가 수입하는 원유의 70%를 차지한다. 우리가 국제유가 움직임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경제가 석유를 워낙 많이 쓰는 체질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10번째로 원유 수입량이 많다. 한 해 수입 금액의 20%가량은 석유 석탄 천연가스 등 에너지원을 사들이는 데 들어간다. 유가가 급등하면 아무리 수출을 많이 해 봤자 무역수지 흑자 규모가 그리 늘지 않는다. 또 유가 상승은 대체로 장바구니 물가 상승으로 연결된다. 자동차 연료,목욕탕,식당 등 석유가 투입되는 제품이나 서비스가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의 석유 의존도가 높은 것은 석유를 많이 쓰는 철강 화학 등 중화학공업 업종이 경제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여전히 높기 때문이다. 생산과정에서 석유를 많이 쓰더라도 제품을 높은 가격에 팔 수 있다면 유가 상승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기술력이나 브랜드 파워 면에서 선진국에 밀리다 보니 기름 값 상승이 수출 시장에서의 경쟁력 상실로 직결되는 경우가 많다. 일반 가정이나 사무실에서도 외국에 비해 석유 등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2002년 말 현재 우리나라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은 4.27TOE(원유 1t을 태웠을 때 얻을 수 있는 열량)로 독일(4.20) 영국(3.83) 일본(4.06) 덴마크(3.67) 등 선진국보다 높다. 웬만하면 선풍기 대신 에어컨을 틀고 소형차보다 중대형 승용차를 선호하는 등 소비의 고급화 및 대형화 바람 탓이 크다. 지금까지 에너지 다소비(多消費)형 경제 체질을 바꾸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부는 1970,80년대의 경제개발 시기에는 유가가 낮을 때 당장 필요한 양 이상으로 원유를 많이 구입해 저장해 둠으로써 유가가 크게 올랐을 때에도 안정적으로 석유를 공급하는 시스템을 운영했다. 동시에 에너지를 많이 쓰지 않고 수출을 잘 할 수 있는 업종을 육성했다. 그 결과 90년대 들어 반도체 휴대폰 LCD 등 IT(정보기술) 산업이 우리 경제의 주력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민간 부문에서 유가에 대한 면역력이 어느 정도 생기자 97년에는 석유가격 자율화 조치를 시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석유 석탄 원자력 등의 화석 에너지를 대체할 수 있는 재생 가능 에너지의 사용 비율은 2002년 현재 1.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가운데 28위에 그쳤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제는 근본적인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첫째,유가 상승을 그대로 가격에 전가하지 않고서도 수출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거나 높일 수 있도록 제품의 부가가치를 높이자는 것이다. 둘째,IT 지식산업서비스업 등 에너지를 많이 안 쓰는 부문을 우리 경제의 주력으로 육성하자는 것이다. 셋째,수소에너지를 이용한 연료전지,풍력과 태양열을 이용한 발전 등 대체 에너지원을 개발해야 한다는 제안도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최근 자주 얘기되는 유류세 인하 논의가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난해 말 이후 휘발유에 부과되는 세금을 낮춰 국민 부담을 줄여주고 소비를 진작하자는 얘기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생계를 위해 차량을 운행해야 하는 샐러리맨이나 자영업자들로서는 반가운 소리다. 하지만 길게 보면 부작용이 없는 것도 아니다. 세금을 낮추면 가계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가처분소득은 증가하지만 에너지 절약과는 거리가 멀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정부의 재정수입이 줄어들어 정부가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공공사업을 할 때 쓸 수 있는 재원이 적어지는 면도 있다. 또한 국제유가 오름세가 장기적으로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면 유류세 인하가 일시적으로 가계의 부담을 줄여주는 효과는 있겠지만,에너지 효율적인 경제구조로 재편하는 데에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배민근 연구원 hybae@lger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