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국가안전기획부의 비밀감청조직이 정치인과 기업인이 자주 가는 식당에 도청기를 설치하고 옆방에서 도청해 만든 불법 녹음테이프 내용이 폭로되면서 그 충격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이번 사건은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992년 12월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비난여론을 불러일으켰던 `부산 초원복집 도청사건'과 거의 흡사하다. 3년여의 재판 끝에 도청을 자행한 당시 안기부 부산지부 직원 김모씨와 국민당 부산선거대책위 간부 문모ㆍ안모씨 등은 `주거침입죄'로 처벌을 받았다. 안기부가 개입된 이번 사건이 터지면서 `부산 초원복집 도청사건'에 대한 관심 이 새삼 높아지고 있다. ◇도청기 설치 `붕어빵' = 제14대 대선을 앞둔 1992년 12월 11일 아침 초원복집에는 부산지역 지검장, 안기부 지부장, 기무부대장, 지방경찰청장 등 8명의 기관장이 김기춘 전 법무장관과 한자리에 모였다. 초원복집에서 마련된 조찬모임에서는 김영삼 당시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당시 정주영(2001.3.21 사망) 후보를 비방하는 내용을 유포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몰래 나눈 대화'는 나흘 뒤 정 후보를 내세운 국민당이 서울 광화문 중앙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면서 폭로됐다. 국민당 부산선거대책위 간부 문종열ㆍ안종윤씨가 안기부 부산지부 직원 김남석씨를 매수한 뒤 조찬 장소와 시간을 파악하고 장롱 위와 창문틀 2곳에 도청기를 설치했던 것. 검찰 조사결과 도청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문씨와 안씨, 김씨에게는 벌금 90만원이 선고됐다. ◇`주거침입죄' 적용 = 이들에게 적용된 혐의는 통신비밀보호법(이하 통비법) 위반이 아니라 `주거침입죄'였다. 당시에는 불법 도청행위를 처벌하는 통비법 같은 법률이 없었기 때문이다. 피고인측은 "주인의 명시적 승낙을 받고 손님으로서 방에 들어간 것이며 도청행위도 기관장들의 불법행위를 적발하려는 정의감에서 이루어진 만큼 불법행위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울지법 형사항소4부는 1995년 9월 "음식점 주인이 도청기를 설치하려는 피고인들의 의도를 알았다면 방에 들어가는 것을 승낙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며 유죄 선고했다. 재판부는 "방에 도청기를 설치하는 행위는 처벌규정이 없어 형벌을 부과할 수 있는 범죄행위는 아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주거지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는 행위는 수단ㆍ방법의 상당성을 잃었기 때문에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통비법 제정 일사천리 = 도청방지를 골자로 하는 통비법안은 여ㆍ야 갈등으로 입법 추진이 지지부진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일사천리로 추진돼 1993년 12월 통과됐다. 통비법은 `누구든지 이 법과 형사소송법 또는 군사법원법의 규정에 의하지 아니하고는…공개되지 아니한 타인간의 대화를 녹음 또는 청취하지 못한다(제3조)'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어길 때는 10년 이하의 징역과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해진다. 따라서 1997년 9월 모 언론사 고위간부와 기업인간의 대화를 불법 도청해 제작된 녹음테이프 내용을 폭로한 이번 사건에 있어서 도청 의혹의 진위와 처벌 여부 등은 통비법에 따라 처리될 전망이다. 그러나 불법도청 행위를 처벌하도록 한 현행 통비법 제16조 1항의 공소시효는 5년이어서 불법도청 가담자들에 대한 처벌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과거처럼 주거침입죄를 적용하더라도 공소시효는 통비법보다 짧은 3년이다. 이에 비해 녹음 내용을 보도한 언론은 보도시점부터 공소시효가 시작된다는 점에서 `공개', `누설'로 처벌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 법조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통비법은 불법 도청으로 얻은 대화 내용을 공개하거나 누설했을 때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심규석 기자 k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