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은 21일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인 1993~1998년 2월까지 당시 국가안전기획부가 특수도청팀을 운영,식사자리에서 오간 유력 인사들의 발언을 불법 도청했다는 의혹에 대한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특히 이 특수도청팀이 도청한 테이프 중 일부를 MBC가 입수했으며, 그 안에는 1997년 대선자금 지원과 관련해 대기업 고위 관계자와 중앙일간지 고위 간부와의 대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져 공개될 경우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 MBC는 이와 관련,이 내용을 이날 오후 9시 뉴스데스크를 통해 1시간30분짜리 테이프에 담긴 육성을 3∼6분 정도 공개할 예정이었으나 당사자들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서울지법 남부지원에 방송중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법원이 이를 사실상 받아들여 구체적인 내용은 방송하지 못했다. 재판부는 "방송 자체를 금지하기는 곤란하지만 테이프의 불법성이 있으므로 테이프의 원음을 직접 방송하거나,대화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거나 실명을 직접 거론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MBC는 이를 받아들였으며 추후 법적 검토를 통해 테이프 내용의 공개 여부를 결정키로 했다. ◆녹취 테이프 내용은 이날 일부 언론보도에 따르면 테이프에는 '(모)대선 후보측에서 30억원을 요구해왔다'는 취지의 내용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또 돈을 현찰로 전달해달라는 문제가 거론됐으며 '한 쪽(후보)에게만 준 것을 다른 쪽이 알면 곤란하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있자 'B후보보다 A후보가 문제다. B후보에게도 조금은 한 걸로 알고 있다'는 등의 내용이 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만약 이 같은 내용이 사실로 밝혀지고 테이프 내용이 추후 공개될 경우 관련기업 및 언론사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전망이다. ◆불법도청 어떻게 이뤄졌나 모두 4명으로 구성된 '미림'이라는 안기부 특수도청팀은 이른바 '망원'(일반인 정보협조자)들을 활용,정계 재계 언론계 유력 인사들이 찾는 술집 한정식 등을 미리 확인한 뒤 현장도청을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림팀의 도청은 청와대 실세나 거물 정치인,재벌기업인 등의 단골 술집과 한정식 집 등에 망원을 심어 예약정보를 입수한 뒤 미리 도청기를 설치하고 옆방에서 엿듣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미림팀에서 생산하는 도청녹취록과 보고용 요약 문건인 '미림보고서'는 국내정보 담당 차장과 안기부장에게만 보고된 것으로 전해졌다. 미림의 도청 테이프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직후 퇴직한 한 안기부 직원에 의해 외부로 유출됐다가 1년여 뒤인 1999년 중반 무렵 안기부 감찰실에 압수됐으며 당시 압수된 테이프는 최소한 8000개로 추산되고 있다. 미림팀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직후인 99년 해체된 것으로 전해졌다. ◆국정원,"진상규명 하겠다" 국정원은 이날 오전 긴급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한 뒤 "잘못된 과거를 씻어 버린다는 자세로 불법도청 의혹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해 한 점의 의혹도 없이 국민들에게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국정원은 이어 조사결과에 따라 잘못된 점이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법적,제도적인 장치를 강구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앞으로 진상조사 과정에서 국정원이 불법도청 의혹뿐 아니라 MBC가 입수한 테이프의 내용에 대해서도 조사를 벌일것으로 보인다. 이심기 기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