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유,그런 소리 마세요." 5일 서울 태평로 삼성전자 본사에서 만난 임원 A씨는 올 여름 장기휴가를 어디로 갈 계획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손사래부터 쳤다. 회사가 임직원들의 재충전 기회를 충분히 준다는 차원에서 올 여름휴가를 최장 15일간 사용해도 좋다는 지침을 내렸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따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A씨는 "영업력을 강화한다고 다들 동분서주하는 판에 어떻게 보름짜리 휴가를 즐기겠느냐"며 "가족동반 해외여행도 진작에 포기했다"고 말했다. 삼성은 이달부터 공식적으로 휴가 시즌에 돌입했지만 분위기는 영 아니다. 오히려 근무기강이 더 세졌다는 평이다. 실적 악화에 대한 우려가 가시지 않고 있는 데다 '거대 삼성'을 비판하고 경계하는 일각의 '삼성공화국론'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어서다. 특히 개정 공정거래법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하면서 '삼성이 마침내 정부에까지 도전한다'는 논란마저 생겨나 골머리를 앓고 있다. ◆"제조 우위 사라졌다" 위기감을 토로하는 최고경영진들의 신호도 쉴새 없이 쏟아지고 있다. 동남아를 방문 중인 이건희 회장은 "중국과 아시아 국가들이 정말 무섭게 추격해 오고 있다"며 "제조 우위의 시대가 끝장나고 있는 만큼 서비스와 소프트 경쟁력을 키우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라고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이 회장은 이달 11일께 베트남에서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과 삼성전자 및 전자계열사 사장단을 모아놓고 동남아 시장 순방에 따른 종합적인 경영구상을 밝힐 예정이다.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역시 지난 1일 월례사를 통해 "원화의 달러 환율이 급변하고 중국 위안화 절상 압력이 고조되는 현실을 냉철하게 파악해야 한다"며 "사업 전 분야에서 경쟁사들을 압도할 수 있는 스피드 경영을 구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조조정본부의 한 관계자는 "비록 외부변수(환율 유가 내수부진)가 작용한 탓이긴 하지만 상반기 실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 하면서 사무실에서 웃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재평가받고 싶다" 삼성은 지난 5월 이른바 '고려대 사태' 이후 불거진 '삼성공화국론'이 TV 토론 주제로까지 등장하자 무척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2000년 이후 다른 대기업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급성장한 '대가'로 치부하기엔 너무 억울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장 '삼성공화국론'에 맞서 반대 여론몰이를 하기보다는 삼성이 국가경제에 기여하는 모습을 꾸준하게 보여주는 길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내부 입장을 정리하고 있다. 삼성이 앞으로도 경영을 잘해 주주와 종업원들의 지지를 얻어나가고 경제도 활력을 되찾아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에 진입하면 자연스럽게 '재평가'를 받지 않겠느냐는 기대다. 헌법소원을 둘러싼 논란 역시 담담하게 헌재의 결정을 기다린다는 자세를 갖고 있다. 구조조정본부 법무실의 김윤근 상무는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을 규정하고 있는 공정거래법 조항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한 것은 순전히 법률적 판단에서 시작된 것"이라며 "삼성이 마치 공권력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는 시각이 있는데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벌써부터 주목되는 인사 임직원들이 올 여름휴가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아직 멀리 남아 있긴 하지만 연말 인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삼성은 올해 초 인사에서 대부분의 사장단을 유임시켰다. 지난해 눈부신 실적을 거둔 데 따른 보상이었다. 하지만 올 연말 인사는 조금 사정이 다르다는 얘기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실적이 나쁘거나 경영상의 실책을 범한 사장들은 물갈이가 불가피하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비록 특별한 하자가 없더라도 세대교체 차원에서 거론되는 사장들도 있다. 사장단 인사가 큰 폭으로 이뤄진다면 임원 인사 역시 마찬가지다. 승진이나 유임을 기대하고 있는 이들에게 평가를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시기는 올 하반기밖에 없다. 주5일제 근무제가 도입되면서 휴가일수는 많이 늘어났지만 정작 삼성 임직원들에게 올 여름은 지난해보다 훨씬 덥게 느껴질 것으로 보인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