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전 대우 회장에게 지난 13일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고단하고 긴장된 하루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5년8개월의 오랜 해외 유랑생활을 접고 마침내 귀국을 결행하기까지 오만 가지 상념에 시달리며 착잡한 날을 보냈다고 측근들은 전하고 있다.


김 회장이 베트남을 떠나던 날,한국경제신문 취재진이 찾아낸 그의 하노이 거처 역시 하루 종일 무거운 적막감에 휩싸여 있었다.


김 회장은 물론 의료진,전 대우 관계자 등은 취재진이 도착한 오전 9시부터(현지시간) 출국을 위해 집을 나서던 오후 10시40분까지 두 곳의 철제 대문을 굳게 잠근 채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밖에서 만남을 요청하는 취재진의 목소리에도 일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관리인들이 뛰어나와 "이 집 주인은 나다"라며 짜증을 부렸으며 심지어 현지 경찰을 불러 기자들을 밀어내기까지 했다. 나중에 귀국 비행기에서 만난 조준형 변호사는 "집 밖에 취재진이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검찰 조사를 앞두고 인터뷰를 하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워 어쩔 수 없었다"고 양해를 구했다.


한국경제신문이 하노이 저택의 소재를 파악하게 된 것은 하노이 중심부에 자리한 멜리아호텔에 김 회장의 법률대리인인 김&장법률사무소의 조준형 변호사와 주치의를 맡은 아주대병원의 소의영·신준한 교수가 투숙했다는 사실을 12일 확인한 데서 시작됐다.


이튿날 오전 6시30분께 멜리아호텔에 도착한 취재진은 잠시후 이들이 김 회장의 비서와 만나 아침식사를 같이 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 자리에서 소의영 교수는 김 회장이 위암 수술 후유증으로 앓고 있는 장협착증 등에 대해 의견을 밝혔으며 김 회장의 최근 건강상태에 대해서도 많은 질문을 던졌다.


식사를 마친 이들은 호텔을 빠져나와 김 회장이 보낸 매그너스 차량에 올라타 모처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취재진도 미리 대기시켜 놓은 차량을 통해 이들을 추적했다. 번호판 '29-NN 691-21'을 부착한 매그너스는 싱가포르 등록 차량으로 확인됐다. 이는 싱가포르의 노블사 소속 차량으로 이 회사는 베트남에서 골프장 사업 등을 하며 김 회장에게 자문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도심에서 하노이공항 방향으로 30분쯤 달리던 매그너스는 오른쪽에 탕롱인터내셔널빌리지가 나타나자 핸들을 꺾었다. 서구 취향의 고급 주택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취재진은 주택가 깊숙이 따라 들어가면서 그동안 하노이 교민들에게조차도 완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던 김 회장의 거처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저택은 한적하면서도 사방이 트인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무더위 때문인지 주위를 오가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취재진은 몇 차례 벨을 누르며 진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 때마다 달려나온 현지 관리인들에 의해 철저하게 차단당했다. "김 회장님,한국에서 기자들이 왔습니다"라고 10여분 고함을 쳐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는 공안들까지 순찰차를 몰고 나타나 취재진을 압박했다.


마침 공사 중이던 옆집 2층으로 올라갔다.


대낮인 데도 저택의 모든 층에는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고 모두 7개의 에어컨 팬은 맹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거기서도 김 회장을 불러봤지만 불쑥 창문을 닫는 정도가 유일한 반응이었다. 김 회장은 아마 그 시간에 건강검진이나 법률자문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저택이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오후 7시께. 베트남에서의 '마지막 만찬'이 시작되고 있었다. 주방 창문 틈으로 여성 요리사들의 모습이 보이고 사람들의 목소리도 간간이 흘러나왔다. 잠시 2층에 모습을 드러낸 김 회장이 짐정리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취재진은 더 이상 밤이 깊어지기 전에 다시 한번 진입을 시도하기로 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이번에는 관리인들이 더욱 화가난 표정으로 나와 "경찰을 부르겠다"고 노골적으로 협박했다. 2층 불이 꺼진 것도 거의 동시였다. 김 회장 측은 외부의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오후 10시40분께 항공기 탑승을 위해 김 회장이 집을 빠져나올 때가 취재진에겐 마지막 기회였다. 차를 가로막고 뒷좌석 문을 억지로 열었지만 김 회장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것까지는 성사시키지 못했다. 좌석 아래쪽으로 깊숙이 몸을 낮춘 데다 옆자리 사람들이 카메라를 밀쳐냈기 때문이다.


결국 김 회장은 베트남 당국의 특별 경호를 받으며 공항 활주로로 직접 차를 몰고 나왔을 때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브리지가 아니고 트랩으로 항공기에 올라선 김 회장은 몰려든 취재진으로 인해 안경이 벗겨질 정도로 극심한 몸싸움에 시달려야 했다. 김 회장의 얼굴에는 곤혹스럽고 착잡한 기색이 역력했다. 귀국소감을 묻는 질문에는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은 채 고개를 숙였다. 20여분에 이른 취재진과 수행원들의 실랑이 끝에 이륙 후 간단한 기내 인터뷰를 하기로 양측이 합의한 뒤에야 항공기 출입문이 닫혔다.


한때 한국 경제를 쥐락펴락했던 기업가의 운명적인 귀국은 이렇게도 요란스러웠지만 김 회장에겐 인생의 그 어느 날보다도 길었던 하루였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긴 시간을 철저한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노이(베트남)=조일훈.강은구.류시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