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KT 등 유선통신 사업자들의 담합 혐의에 대해 막대한 과징금을 부과하자 '행정 지도' 논란이 새삼 일고 있다. 유선통신 사업자들은 정보통신부의 행정 지도가 정작 문제의 근원인 데도 공정위가 자신들만 두들겨 팬다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공정위의 화살이 이번엔 이동통신 사업자들로 옮겨갈 것으로 예고되면서 행정지도 논란은 더욱 거세질 조짐이다. 공정위는 각 부처의 행정 지도는 단순한 권고일 뿐이므로 이에 따르고 안 따르고는 사업자 판단에 달린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사업자들도 뭔가 이익이 되니 행정 지도를 따른 것 아니냐는 것이 공정위의 생각인 것 같다. 물론 그런 측면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현실에서 그렇게만 생각할 수 있는지는 정말 의문이다. 1979년 미국 하버드대 에즈라 보겔(E.Vogel) 교수는 '넘버원 일본(Japan as No.1)'이란 책에서 일본의 행정 지도를 언급한 바 있다. 당시 서구학자의 눈엔 그런 게 신기해 보였던지 보겔은 일본 통산성의 행정 지도가 어떻게 업계의 협조를 얻을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나름대로 분석해 놨다.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기업들은 통산성의 행정 지도에 협조하면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받고, 그렇지 않을 때는 '숨은 벌(罰)'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대목이다. 행정 지도가 형식적으로는 법적 구속력이 없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론 왜 강력한 구속력을 갖는지 곰곰 생각해 보면 예리한 관찰이 아닐 수 없다. 사실이 그랬다. 일본의 산업정책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숨은 벌'의 사례로 1980년대 중반 산코해운의 도산 사건을 꼽는다. 1960년대 중반 해운 불황을 맞아 일본 정부는 해운회사 통ㆍ폐합이라는 소위 산업합리화 조치를 단행했다. 그러나 당시 산코해운은 이에 반발해 불참했고, 정부의 숨은 벌은 20년 뒤에 가해졌다. 1980년대 중반 산코해운이 심각한 재정난에 빠졌을 때 일본 정부는 이 회사에 대한 지원을 단호하게 거절한 것이다. 숨은 벌의 사례가 어디 일본뿐이고 또 과거에 국한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규제가 많을수록 숨은 벌은 언제든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 아마 우리 기업더러 이와 관련해 말문을 열라고 하면 봇물 터지듯 할 것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소관 부처의 행정 지도에도 불구하고 공정위가 기업들에 담합 과징금을 부과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8년에는 맥주회사들이 당시 재정경제원의 행정 지도로 맥주가격 인상을 조정했다가 공정위로부터 담합 제재를 받았고, 2002년에는 손해보험회사들이 금융감독원의 행정 지도로 자동차 보험료를 조정했다가 공정위로부터 과징금을 얻어 맞았다. 그러나 이들 사건이 보여주듯 공정위의 결정은 대법원에서 번번이 깨졌다. 그럼에도 공정위는 막무가내다. 예외로 인정받을 담합이 아니면 앞으로도 기업들에 제재를 계속하겠다는 얘기다. 여기서 공정위가 말하는 예외란 공정위의 사전 허가를 받은 경우와 법령에 근거한 행정 지도, 두 가지뿐이다. 그러나 법적 근거를 갖춘 행정 지도는 사실상 별로 없다. 그러니 이래저래 기업들만 죽을 노릇이다. 기업의 자율과 창의가 요구되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행정 지도도 정말 문제지만 기업들을 때림으로써 해당 부처를 압박하려는 듯한 공정위의 접근 방식도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정부 혁신'이니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니 하는 구호들이 너무도 무색하게만 느껴진다. 안현실 논설위원ㆍ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