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12일 오전 11시55분, 대통령 탄핵소추안의 국회 본회의 통과는 한국정치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꿔놓는 기폭제가 됐다. `탄핵풍'으로 상징될 정도였던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후유증은 탄핵이전의 정치지형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탄핵의 `불명예'를 감수해야 했지만 탄핵을 거치면서과반의석의 집권여당과 의회권력까지 확보함으로써 오히려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수 있는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반대로 탄핵은 그 이전까지 `영원한 제1당'이었던 한나라당을 원내 제2당의 위치로 끌어내렸고, 정통야당의 명맥을 지켜왔던 민주당의 쇠락을 재촉했다. 지난 17대 총선에서 정당투표제 도입의 힘도 있었으나 진보세력인 민주노동당이첫 원내진출에 성공하면서 그것도 일약 10명의 의원을 배출한 것도 탄핵의 효과를배제하고는 생각하기 힘든 일임은 물론이다. 정치판은 이처럼 갑자기 나타난 `탄핵의 광풍'으로 인해 새로운 판이 짜여졌으며, 이는 이후 1년간 벌어진 정계의 변화무쌍을 잉태한 출발점이기도 했다. 참여정부 정책평가위원장을 맡고 있는 임혁백(任爀伯) 고려대 교수는 지난 1년을 ▲탄핵과 총선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대결기 ▲신행정수도 이전과 4대 개혁입법이추진됐던 정책적 경쟁로 구분할 정도로 `탄핵 포스트 1년'은 여야가 첨예한 각을 세운 기간으로 볼 수 있다. 이 가운데서도 정치판을 뜨겁게 달구면서 요동치게 했던 문제는 이른바 `4대 입법' 논쟁이었다. 열린우리당은 탄핵풍의 직.간접적인 덕분으로 총선을 거치면서 47석에서 152석으로 몸집이 불어났고, 그 여세를 몰아 국가보안법 폐지, 사학법 개정, 과거사법 제정, 언론관계법 등 4대 입법의 연내통과에 사실상 `올인'했다. 우리당의 개혁입법 드라이브는 한나라당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키면서 여야간 한랭전선을 형성했고, 결국 이는 우리사회의 이념적 간극을 확인하는 수준을 넘어서 심화시키는 선까지 발전한 측면이 있다. 노 대통령의 집권 2년차에 해당하는 `탄핵후 1년'의 기간에서 부족했던 점으로지적되는 사항중 국민통합 부분이 거론되는 이유도 이런데서 연유한 측면이 강해 보인다. 탄핵 이후 깊게 패인 여야간 감정의 골은 상호 극한대결을 불러와 색깔공세, 몸싸움, 욕설, 회의장 점거농성 등 정치판의 고질병을 다시 도지게 함으로써 정치냉소주의를 부추겼다는 지적도 있다. 탄핵의 후유증은 을유년 새해를 경계로 다소 다른 방향으로 정치권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거대여당으로서의 자신감과 의욕을 갖고 17대 국회 첫해 활동에 임했던 열린우리당이 쓰디쓴 좌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해 들어 정국기조를 `개혁'에서 `실용'으로 전환하는 전략적 유연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반면 여당의 개혁드라이브로 인해 당의 결속력이 오히려 강화됐던 한나라당은 `국가보안법 사수'의 그늘에서 뚜렷한 정책대안없이 대여 강경투쟁에 몰입하다가 결국 지난달 행정도시특별법의 국회 본회의 통과를 계기로 갇혀있던 내부갈등이 일시에 분출되면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한편 탄핵정국은 한국정치에서 시민과 인터넷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보여줬다. 탄핵소추안 가결 직후부터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 도심에서 `탄핵무효'를외치는 촛불시위가 연일 벌어지면서 탄핵역풍을 메가톤급 태풍으로 키워냈고, 이는17대 총선 결과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인터넷은 여론을 주도하고 평범한 유권자들을 조직해 길거리로 나서게 하는 핵심적인 수단이었다. 그러나 탄핵은 정치권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이념.세대간 첨예한대결을 불러일으켜 대다수 사회 구성원들의 가슴 속에 쉽게 치유되기 힘든 상처를 남겼으며, 국가적 에너지의 소모를 초래했다는 지적이다. (서울=연합뉴스) 맹찬형기자 mangel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