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국민연금이 공개한 보유 주식에 대한 의결권 행사 기준은 연기금 의결권 행사를 놓고 일각에서 제기되는 신(新)관치 우려를 불식시키는 한편 외국 투기자본이 국내 기업에 대해 적대적 M&A(인수.합병)를 시도할 경우 이를 적극 방어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국민연금은 경영권 분쟁때 기본적으로 현 경영진을 지지하겠다는 원칙을 밝혔다. 이와관련,시장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당장 다음달 11일로 예정된 SK(주)의 주총에서 소버린과 SK간에 작년에 이어 경영권 대결 2라운드가 벌어질 예정인 가운데 국민연금의 "보수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할 가능성을 시사하는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와 함께 의결권 행사에 있어 '투명한 원칙'을 공개,연기금 의결권이 정부나 여권에 의해 민간기업 경영권에 간섭하거나 도덕률을 강요하는 도구로 활용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에 대해 안전장치를 마련했음을 선언하는 의미도 깔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그동안 '섀도 보팅'(shadow voting:주총 찬반투표 결과에 비례한 표결) 관행을 따라왔던 연기금이 앞으로는 의결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투명한 행동근거와 원칙'을 공표함으로써 오해의 소지를 덜겠다는 것이다. 국내 최대 기금이자 기관투자가인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기준은 아직 구체적 기준을 마련하지 않은 다른 연기금을 비롯한 기관투자가들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관측된다. 사실 연기금의 의결권 행사는 '당연한 권리'라는게 지배적인 견해다. 기업이 주주가치를 훼손시킬 우려가 있을 때 이를 견제함으로써 주주권리를 지키고 기금수익률을 제고할 수 있어서다. 특히 기업지배구조 측면에서 연기금의 의결권행사는 기관투자가로서 자신들의 발언권을 강화,지배주주의 전횡을 견제할 장치로도 활용될 수 있다. 실제 주식비중이 60%를 넘는 외국 연기금의 경우 기업 경영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형태로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다. 대표적 공적연기금인 미국 캘퍼스는 87년부터 92년까지 5년간 42개 회사를 '집중감시 대상기업'으로 정하고 이들 기업을 상대로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를 통해 지배구조 개선을 추진했다. 또 월트디즈니 최고경영자(CEO)인 마이클 아이스너를 비롯해 기업 이사 수백명을 퇴진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의결권 행사가 '양면의 칼'이라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우리나라 현실상 정부나 여권이 정치적 목적에 따라 기업 경영진이나 이사진의 임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재벌정책 수단으로 연기금 의결권을 사용할 소지가 다분하다는 주장이다. 조명현 고려대 교수(경영학)는 "경제논리로만 본다면 연기금의 의결권 행사는 기업가치를 제고하고 연기금의 자산가치를 높여 국민 모두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겠지만 연기금이 여러 가지 경로로 정부와 여권의 영향 하에 놓여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라며 "정부나 여권이 마음만 먹으면 기업 분야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칠 소지가 없지 않다"고 지적했다. 실제 이번 공개된 기준에도 '과도한'이나 '지나치게' '현저한' 등의 모호한 문구가 들어있어 향후 '자의적인 판단'의 소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조 교수는 "의결권 행사의 독립성은 결국 연기금의 독립성과 직결된 만큼 연기금이 정치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김혜수 기자 dears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