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외국 투자회사의 즐거운 놀이터' 지난해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외국 투자회사들이 주무르고 있는 한국 금융시장을 이렇게 묘사했다. 외국 자본이 금융에 이어 산업자본마저 넘보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 새해 들어 사모펀드를 중심으로 한 외국자본들이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에 성공,'알짜'로 다시 태어난 국내 기업에 군침을 흘리고 있다. 외환위기 직후에는 덤핑매물로 나온 금융회사와 주식(채권)을 헐값에 사들여 큰 돈을 만졌다면 이제는 산업자본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양상이다. 한국을 주목하지 않았던 외국계 메이저 펀드들도 '먹잇감'을 찾아 국내 상륙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M&A시장은 외국기업 놀이터 지분 매각이 예정된 주요 기업엔 어김없이 외국계가 달려들고 있다. '먹으면 대박'이란 과거의 학습효과가 촉매제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 국내 소주 시장의 '자존심'인 진로 인수전에는 뉴브릿지캐피탈과 아사히 기린 등 일본의 맥주업체가 컨소시엄을 형성,뛰어들었다. 국내 업체가 공정위의 독과점 규제란 족쇄에 발목이 잡혀 있는 것과 달리 외국계는 별다른 제한이 없어 상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서있다. 외환위기 이후 공적자금 투입과 뼈를 깎는 구조조정 끝에 회생의 발판을 마련한 옛 대우계열사도 외국 자본의 좋은 '사냥감'으로 거론된다. 자산관리공사가 매각을 추진 중인 대우건설은 미국 벡텔사가 인수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대우캐피탈도 미국계 사모펀드인 론스타 등 외국계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론스타는 비디오테이프 제조업체인 새한미디어 매각의 우선협상 대상자로도 선정된 상태다. 국내 최대 보험사인 삼성생명은 뉴브릿지캐피탈이나 워버그핀커스가 2대주주로 떠오를 가능성이 크다. 지분(17.64%) 매각 입찰 결과 뉴브릿지캐피탈이 우선협상자로,워버그핀커스가 예비대상자로 각각 선정됐기 때문이다. UBS 등 유럽계 회사가 주축이 된 월드스타컨소시엄은 동아건설 파산채권 매각협상에서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돼 대한통운 지분도 10% 이상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차익실현으로 실탄 확보 론스타 칼라일 등 외국계 펀드들은 보유하고 있던 오피스 빌딩을 지난해 대부분 처분,막대한 차익을 손에 쥐었다. 이를 통해 '실탄'을 확보한 이들은 새로운 인수 대상 물색에 한창이다. 론스타는 지난 2001년 서울 강남 역삼동 스타타워를 현대산업개발로부터 7천억원가량에 사들여 지난해 말 싱가포르투자청(GIC)에 9천8백억원선에 매각하는 계약을 체결,3천억원에 가까운 차익을 남기게 됐다. 론스타는 앞서 지난 99년 매입한 여의도 SKC 빌딩과 동양종금증권 빌딩을 호주계 맥쿼리자산운용에 매각,3백40억원을 챙겼다. 론스타는 조만간 부동산개발과 관련한 자회사를 설립할 계획이다. 론스타 관계자는 "올해부터 구조조정이 완료돼 매물로 나올 M&A(인수합병) 대상 기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들의 성공신화에 자극받은 외국계 메이저 펀드들도 밀려올 조짐이다. 유럽에서 영향력이 큰 컨설팅회사 베인앤컴퍼니의 경우 조만간 CEO(최고경영자)가 방한,탐색전을 벌일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한국에 관심 없던 미국계 메이저 펀드와 독일계 펀드들도 한국 진출을 서두르고 있다. ◆산업주권 상실 및 국부유출 우려 현재 매물로 나온 주요 기업 20여개 중 절반 이상은 외국계로 넘어갈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공적자금과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을 통해 우량업체로 탈바꿈한 기업들을 고스란히 외국계에 빼앗기는 꼴이다. 국내에 투자한 외국 자본이 대부분 고배당을 통해 회사의 여유자금을 빨아들인 뒤 다시 매각하는 행태를 보여왔다는 점에서 국부유출도 우려된다. 실제 뉴브릿지는 제일은행 지분 51%를 매각,5년 만에 1조1천5백억원의 차익을 남겼다. 론스타가 주인인 외환은행도 같은 전철을 되풀이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게다가 최근 외국자본의 베팅 규모가 갈수록 커지면서 국내의 방어능력을 넘어서고 있다. 뉴브릿지의 제일은행 매각금액은 주당 1만6천5백원이 넘는다. 이는 자신의 인수가격인 5천원은 물론 앞서 인수를 시도했던 HSBC의 제시가격 1만5천원을 훨씬 웃도는 수준이다. 동아건설 파산채권 우선협상자로 선정된 월드스타도 예비협상자인 골드만삭스보다 2배가 넘는 6천억원을 제시했다. 대응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외국인' 그들만의 잔치를 지켜봐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건호.유창재 기자 leek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