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출발신호 기다리는 젊은이들을 뛰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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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주 < 서강대 명예교수.경제학 >
지난해 세계경제는 미국의 호경기 지속,일본의 뚜렷한 회복세,유럽연합(EU)의 회복세,그리고 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의 고속성장 등 전반적으로 호황이었으나,한국은 4% 후반 성장에 그쳤다.
중국 9%,동남아 국가 6.4%에 비하면 초라하다.
새해에도 한국은 조심스럽게 3.7% 성장을 예상하지만 중국은 8%,동남아는 5.8%의 성장을 자신있게 전망하고 있다.
오랫동안 고도성장의 대명사로 세계인의 부러움을 샀던 한국경제가 근래에는 주변국의 웃음거리로 전락한 느낌이다.
그것은 국제 원자재 품귀와 같은 공통의 성장 둔화 요인 이외에 국내에서 경제 저력을 감퇴시키는 요인들을 스스로 양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 잘 날 없던 한국경제였지만 고도성장기의 정부는 불어오는 외풍 막기에 내공을 모았었다.
며칠 전 대통령이 송년 기자 모임에서 "나로서 비롯된 일이 너무 많았다""세상 일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없고""국민과 함께 더불어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이런 반성,이런 인식이 지속되기 바란다.
특히 그 말이 '국민'의 포괄범위를 확대해 지난날 국민경제 활동의 주역들을 폭넓게 감싸는 의지의 표현이라면 의미가 크다.
사실상 현 집권세력만큼 세상을 바꾸겠다는 뜻으로 배타적으로 똘똘 뭉친 집단도 드물다.
모든 사회는 그 흥망성쇠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권리 의무를 다하는 기득권세력이 있다.
이들이 부실·나태해지면 새로운 계층이 등장해 지배층을 교체하면서 사회가 발전한다.
이들이 경제 사회 발전에 내세울 만한 기여가 없었던 집단에 의해 부당하게 지탄받고 권익이 위협받게 되면 사회 갈등이 격화된다.
바로 이것이 한국병(病)의 뿌리다.
주춤대는 한국경제 엔진을 어떻게 점프 스타트시킬 것인가? 먼저 정부가 해야 할 아젠다 정리부터 해야 한다.
모든 과제를 추진함에 있어서 예산 소요를 머리 아프게 따져야 한다.
현 정부는 출범 때부터 좌파 또는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이란 비판을 받았다.
그 진부 판정은 어떤 이념적 잣대보다도 예산 제약을 빠듯하게 인식하느냐의 여부에 달렸다.
여기에 걸리는 대목이 이곳 저곳에서 보인다.
자원 제약 때문에 정책과제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시간을 통한 분업을 생각해야 한다.
대(代)를 이어 과제를 승계한다는 발상 말이다.
물론 이것 때문에 20∼30년 계속 집권을 도모하는 포부를 품겠지만,경제 챙기기에 올인하지 않고서는 그것은 백일몽에 지나지 아니한다.
올해 수출은 환율과 원자재가 움직임이 주요 변수일 것이다.
지난해 높은 신장세는 다소 누그러지겠지만 연간 2천8백억달러선에 근접할 것으로 전망된다.
문제는 내수에 있다.
민간소비는 가계부채 정리 진척에 따라 경미하게 회복될 단계에 와있다.
그러나 물가 상승에 밑도는 저금리 때문에 금리소득자와 퇴직·고령자들의 지출 증대는 기대난이고,부동산시장 냉각과 증시 침체 때문에 부(富)의 효과가 오히려 역으로 작용할 성싶다.
최근 청와대가 언급한 생계형 가계부채 탕감은 도덕적 해이를 조장하는 포퓰리즘의 표본이다.
내수 부양의 핵심은 설비투자다.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의 고통 끝에 기업부문의 부채비율은 크게 낮아지고 재무구조가 건전해졌다.
이익잉여의 사내유보도 크게 늘었고,금융회사들은 대출을 못해줘 안달이다.
그런데도 선뜻 설비투자에 나서지 않는 것은 불확실성,솔직히 말해서 불안 때문이다.
정부의 간섭과 규제,노조의 쟁의,NGO와 대중매체의 반기업 정서에 밀려 투자할 엄두를 못내고 있다.
시장경제는 사유재산권을 보호하는 정부 자세가 분명해야 비로소 꽃 피고 열매 맺는 민감한 식물이다.
고도 성장기를 주도하던 대기업 1세들이 무대에서 사라졌다.
맨 주먹으로 재벌을 일으킨 동물적 본능의 기업가정신,저돌적 추진력,반짝하는 창의력을 가진 이들이 사라진 뒷자리에 관리자형 경영인들이 진주했다.
대체로 이들에게는 '창조적 파괴'를 기대하기 어렵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이 강조됐다.
세계 일류기업의 모범사례를 따르는 것은 좋으나,기업 의욕 감퇴라는 부작용이 따랐다.
이것을 더욱 부채질하는 것이 정부다.
출자총액 한도제 운용이 지나치게 경직적인 것도 기업투자 감퇴 요인이다.
개방된 현실 경제에서 다국적기업의 세계적 시장 점유율은 외면하고 좁은 국내 시장 점유율을 따져 국내 기업을 옥죄어 경쟁력을 꺾는다.
집단소송제도 역시 기업 의욕을 줄이는 무기로 작용할 것이다.
고소·고발을 즐겨하는 국민들이 살판 났다.
과거사면 또는 유예기간을 두는 등 경과조치가 바람직해 보인다.
근래 변화 조짐이 나타나고 있지만 정부와 노조의 밀월관계가 지속됐다.
가입률이 11% 정도에 불과한 노조를 정부가 전체 노동자의 대표로 상대해준 것이 문제다.
노동귀족들의 손에 노는 공기업·대기업 노조들이 거개의 국민과 하도급기업 노동자의 권익을 담보로 쟁의를 일삼았다.
전공노 전교조도 공익을 외면하긴 마찬가지여서 그들이 지향하는 이념에 의심을 자아냈다.
유럽에서도 노조 가입자가 급락하고 있다.
독일은 한때 40%에서 20%로 반감되고 프랑스는 8%에 불과하다.
이탈리아는 노조원 중 30%가 퇴직자들이다.
이들의 철밥통에 밀려 청년 구직자들은 일자리 문전에서 좌절한다.
쌀시장 개방 반대 데모를 하는 농민의 집단이기주의도 문제다.
인구 8% 미만의 농민이 고작 GDP의 4% 미만을 생산하는 재래식 농업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92% 국민의 이익을 가로막고 있다.
노동자·농민의 과보호는 정부 포퓰리즘 때문이다.
전문직종들도 예외는 아니다.
법률 의료 교육 영화의 시장 개방을 반대하는 세력은 한 번 딴 면허증을 평생 우려먹고 사는 전문직들의 이기심을 극복해야 국익이 증진된다.
타인의 '기득권'(어렵게 말해서 '경제적 지대')의 폐단을 철폐하는 데 반대할 국민은 드물다.
최선의 방법은 시장경쟁을 도입하는 것이다.
독점이 있는 곳에 경쟁 기업의 진입 길을 트고,국내 과점시장에는 대외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 바른 길이다.
지난날 한국경제는 대외지향적 전략 덕분에 고도성장을 구가할 수 있었고,시장개방화 이후에는 그 혜택을 소비자들이 균점할 수 있게 되었다.
외환위기 이후 타율적 개방도 긍정적 효과가 있었다.
요즘 예전 서부극의 '돌아온 장고'가 재연되고 있는 느낌이 든다.
관치경제를 다시 살리려는 듯한 발언을 공직자들이 서슴없이 토로하고 있다.
외환위기 때 바닥이었던 외환보유액이 2천억달러에 이르렀으니 외국 자본 도입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을 달리하기로 작정한 것인가? 중국으로 떠나는 국내 자본을 메워주고 기술 도입,고용,조세에 기여하는 외국 자본의 기여를 외면하긴가?
바로 이 대목에서 어설픈 동맹관계를 만나게 된다.
한편으로는 경영권 위협에 직면한 부실기업 경영인,개입을 선호하는 관료,무식을 애국으로 위장하는 시민단체와 언론계,다른 한쪽으로는 구조조정의 압박을 기피하려는 노동자 농민 등이 모처럼 배짱이 맞아떨어진다.
정치계의 포퓰리즘은 이 장면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방경제 지향은 계속돼야 한국경제의 살 길이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틀 속에서 다자간 협상으로 시장개척과 분쟁해소를 추진하는 것이 최선이지만,현실적으로 쌍무적 자유무역협정(FTA)의 네트워크를 짜 나아가는 것이 차선이다.
이 같은 경제 협력체제 구축을 위해서는 물론 안보관계를 위해서도 세계 도처에 선린관계를 넓히고,자원보유국을 비롯한 주우방국과의 다차원적 관계를 돈독히 함이 절실하다.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굳건히 해야 일본 중국 러시아뿐만 아니라 북한도 서울의 목소리를 경청하게 된다.
성장과 분배를 양자택일로 보는 실효 없는 논쟁을 마감하자.성장만한 분배정책은 없다.
생산·고용이 없는 곳에 지속 가능한 분배가 존재할 수 없다.
다행히도 주변 국가들도 고질적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일본은 아직 버블 후유증에서 완전 탈출하지 못했고 중국도 빈부 격차,은행 부실,농촌문제 등으로 속병이 들어 있다.
양국이 조여오는 호두까기 두 날 사이에 한국이 기사회생 운신할 마지막 틈새가 잠시 열려 있다.
그 짧은 기간에 한국의 선택이 중요하다.
이상주의적 공리공론을 마감하고 실용주의 노선으로 돌아서야 한다.
정부가 공정한 심판자가 되면 시장경쟁에 따라 기업의욕이 되살아나 효율적 생산이 이루어지고 그 결실로 분배의 형평도 이룩될 것이다.
열심히 뛰고 싶은 유능한 젊은 인력들이 출발선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이들을 뛰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