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院산책] (18) 위봉사 위봉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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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날이 임박한 것도 아닌데 주지 스님은 종무소에서 연등에 붙일 종이 연꽃을 말고 있다.
왜 벌써 연등 만들 준비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지금이 아니면 만들 시간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월 초하루만 지나면 농사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 때문에 농한기에 연꽃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얘기다.
완제품 등을 사서 거는 곳이 많은 요즘,1천개가 넘는 등을 일일이 만드는 정성이 놀랍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의 추줄산(山+酋,山+卒山) 위봉사(威鳳寺).
산 이름이 참 특이하다.
사전에 오른 정식 이름은 위봉산인데 산세가 얼마나 대단했으면 가파를 추, 험할 줄이라고 했을까.
해발 5백24m의 추줄산은 삼국시대엔 백제와 신라의 국경이었고, 조선시대에는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를 가르는 학풍의 경계였다.
조선 숙종 때에는 유사시에 조선 태조 영정을 피난시키기 위해 둘레 16㎞의 위봉산성을 축조했을 정도로 산세가 험준하다.
포장도로가 개설되기 전인 1980년대까지만 해도 오지 중의 오지였던 이 위봉산성 안에 전북을 대표하는 비구니 선원이 있다.
백제 무왕 5년(604년)에 서암(瑞岩) 대사가 산문을 연 위봉사 위봉선원(圍鳳禪院).위봉선원의 '위(圍)'가 위봉사의 '위(威)'와 다른 것은 31본산으로 지정되기 전 원래 글자가 '위(圍)'이기 때문이라는 게 법중 스님의 설명.신라 말 최용각이라는 사람이 세마리 봉황이 산꼭대기를 감싸고 있는 것을 보고 위봉사를 중창했다는 설화나 절터가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세인 것 등을 보더라도 '위(圍)'가 맞을 성싶다.
일제 때만 하더라도 전국 31본산의 하나로서 전북 일원의 50여개 말사(末寺)를 관장했던 위봉사는 한국전쟁 이후 폐사 위기에 처했다가 지난 88년 10월 법중(法中·54) 스님이 주지를 맡으면서 옛 모습을 되찾고 있다.
"전국의 선방을 다니며 공부하고 있을 때였어요.
아는 비구니 스님이 저를 찾더니 위봉사 얘기를 해요.
주지 소임을 맡을 생각이 없다고 해도 꼭 와보라고 해서 구경만 하고 가려는데,어른 스님이 '여기에 도량을 세우면 도인이 많이 나올 곳'이라며 강권해 절 살림을 맡게 됐지요."
처음 왔을 땐 법당 문짝도 없을 정도로 형편이 엉망이었다고 한다.
보물 제608호인 보광명전(普光明殿) 주변은 오물 투성이었고 관음전 안에는 쓰레기가 가득했다.
법중 스님은 그동안 유실된 사찰 소유지 8천7백여평을 다시 사들이고 퇴락한 당우(堂宇)들을 복원해 10여개 동의 건물에 50∼60명의 스님들이 상주하는 대찰의 면모를 되찾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한 일이 위봉선원의 개원이다.
"2년 동안 가건물에서 안거하다 대웅전 위쪽 대지에 45평 규모의 선방을 신축해 지난 90년 가을 정식으로 선원을 열었지요.
고찰 터인데다 나옹·무학·진묵·서산 대사 등 많은 도인들이 살았던 대명당지(大明堂地)여서 도량의 기(氣)가 아주 성해요.
비구니 선원으로서 이렇게 헌출한 도량은 아마 없을 겁니다."
위봉선원은 개원 이래 지금까지 하안거와 동안거,두차례의 산철(안거하지 않는 기간) 결제 등 1년에 네번씩의 결제(안거를 시작하는 일)를 지속해왔다.
"산철 결제를 하는 곳이 별로 없어 이곳엔 산철 대중이 더 많아요.
선방의 적정 인원은 28명이라 서른 명 안쪽이 살았으면 하지만 비구니 선방이 부족하다 보니 늘 정원을 넘어요.
이번 철(동안거)에도 34명이 방부(房付·입방 신청)를 들여 석 줄로 앉아서 정진하는 실정입니다." 이 때문에 위봉선원에는 일부 연로한 선객들을 빼고는 오래 머물 수가 없다.
선객이 한 곳에 오래 있으면 살림 사는 사판(事判)들과 친해지고 자연히 말이 많아져서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것.새벽 3시부터 하루 12시간씩 정진하는 선객들은 선원청규(淸規) 외에도 입중오법(入衆五法)을 지키며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가운데 살아야 한다.
'모든 서적,신문,잡지 등은 볼 수 없다.
경전·조사어록도 공적인 경우 외에는 볼 수 없다.
전화·서신·외부연락 금지.예불·청법·공양 외 사무실·후원 출입금지….'(선원청규)
'하의(下意·자신을 낮춤),자비,공경,지차서(知次序·선방 내 서열 존중),불설여사(不說餘事·나머지 일은 말하지 않음)'(입중오법)
위봉사는 금산사 말사이지만 인천 용화선원에 가서 안거의 시작과 끝인 결제·해제 법회에 참석한다.
평소에도 용화선원 조실이었던 전강 스님과 송담 스님의 육성 법문을 녹음테이프로 들으며 공부를 점검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수행하는 선객들을 위해 법중 스님을 비롯한 위봉사 대중들은 1년 내내 쉴 틈이 없다.
쌀은 다른 절에서 보내주고 있지만 채소는 직접 농사를 지어서 충당하는 탓이다.
이 겨울에도 5개 동의 비닐하우스에서 배추 무 시금치 등을 재배하고 있다.
선객들은 선방에서,나머지 스님들은 밭에서 일로써 수행하는 셈이다.
연꽃잎을 만드느라 손놀림이 분주한 법중 스님에게 송년(送年)의 감회를 물었더니 이렇게 답한다.
"한 해가 넘어간다고 중이 새 옷을 입겠습니까,꽃단장을 하겠습니까.
깨달음은 멀기만 한데 또 한 해가 그냥 가니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어렵고 힘들다고 탄식하며 보낸 하루가 모여 한 해가 되고,일생이 되거든요.
옛 도인들은 그래서 하루 해가 넘어갈 때 두 다리를 뻗고 울었답니다."
수행자에게는 길게 볼 것도 없이 하루 하루,순간 순간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오후 4시,정진을 마치고 선방을 나서는 선객들의 눈빛이 형형하다.
화두 일념으로 한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매달렸던 그들이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어찌 수행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이겠는가.
완주=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