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카슈랑스 시행 일정을 앞당겨야 한다고 했던 저의 당초 주장은 국내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이었음을 인정합니다" 최근 열렸던 보험관련 세미나에서 K대의 L모 교수는 이렇게 '고해성사'를 했다. L교수는 방카슈랑스 검토 단계에서 "은행,보험사,소비자 모두에게 윈윈이 될 수 있다"며 조기시행을 주장했던 대표적 인물.그런 그가 지난 15개월간의 제1단계 방카슈랑스 시행 결과를 지켜본 후 내린 결론은 "보험선진국과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최근 정부와 국회에서 방카슈랑스 일정을 수정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즉 기존의 방카슈랑스 시행계획은 △일정이 촉박한 데다 △은행과 보험의 상호주의가 결여돼 있고 △설계사 실직 대책이 없으며 △감독체계가 부실한 점 등 처음부터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는 지적이다. ◆도입 취지와 효과 방카슈랑스를 도입한 취지는 △금융소비자의 편익 증대와 △금융회사의 경쟁력 제고 두 가지였다. 실제 방카슈랑스가 시행된 이후 방카슈랑스 전용 생명보험 상품 보험료는 평균 2.5∼2.8% 인하됐다(보험개발원 조사).또 저축성보험의 신계약이 전년보다 약 2.6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은행들은 이런 점을 들어 방카슈랑스 도입 취지가 서서히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보험업계의 주장은 다르다. 보험사들도 보험료 인하와 시장의 확대는 인정한다. 그러나 △은행들의 횡포로 추가적인 보험료 인하효과가 제한받고 있으며 △불완전 판매의 횡행으로 보험상품에 대한 신인도가 오히려 떨어졌으며 △제2단계 대상 상품인 자동차보험의 경우 신규 시장 창출이 힘들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놓고 있다. ◆보험사의 위기감과 연기론의 대두 "방카슈랑스 시행 초기 일부 은행이 너무 많이 판매한 것이 실책이다." 한 시중은행장은 제2단계 방카슈랑스 연기 논쟁이 한창이던 지난 10월 이렇게 말했다. 방카슈랑스가 시작된 작년 9월부터 1년 동안 은행들이 판매한 생보상품은 3조1천억원어치(초회 보험료 기준).생보사 전체 판매액 7조2천억원의 43.2%에 달하는 수준이다. 개인저축성보험의 경우 64.7%가 방카슈랑스를 통해 판매됐다. 당초 전문가들은 오는 2012년에 가서야 방카슈랑스가 신규 보험시장의 20%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했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은행의 파괴력이 엄청난 것으로 나타났고 보험사들은 생존의 문제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특히 내년 4월로 예정된 제2단계 방카슈랑스 대상인 자동차보험(개인)과 종신 및 CI(치명적 질병)보험 등은 제1단계 대상인 저축성보험과는 또 다르다. 설계사들은 수입의 90%를 이들 상품에 의존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설계사들은 제2단계 방카슈랑스가 예정대로 시행되면 30%가 실직할 것이라며 강하게 연기를 주장하고 나섰다. 시행 초기 감독이 느슨한 틈을 타 불완전 판매와 꺾기가 많았던 것도 '제2단계 연기론'에 힘을 보탰다.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방카슈랑스의 불완전 판매 비율이 7.3∼8.9%로 설계사(2.1∼3.8%)에 비해 2.2∼3.6배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는 결과(한나라당 이혜훈 의원)가 발표됐다. 또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가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대출과 관련해 보험 가입 권유를 받은 기업이 전체의 27.5%로 나타나기도 했다. ◆2년 연기는 미봉책일 뿐 정부와 국회는 제2단계 대상 상품 중 자동차보험과 종신보험 및 CI보험의 시행 시기를 오는 2007년으로 2년 늦추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완전 허용 시기도 당초 2007년에서 2009년으로 연기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같은 방안은 '문제의 해결'이 아닌 '문제의 유예'에 불과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2007년이 된다고 해서 설계사 문제가 해결되거나 보험사의 은행 예속에 대한 우려감이 사라진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은행에 예속될 것이라는 보험사의 우려와 실직에 대한 설계사의 우려를 해소할 만한 대책을 한꺼번에 내놓는 것이 금융산업 발전을 위해서라도 바람직한 것으로 지적된다. 하영춘 기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