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시 남구 호동 철강산업공단 내에 위치한 도료전문 제조업체인 애경피앤씨. 공장 입구에 들어서자 돌로 만든 높이 2m 남짓되는 기념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우리 비록 작게 시작했지만 크고 따뜻한 삶의 터로 가꾸고자 새천년 창립 15주년을 맞아 하나된 마음을 담습니다." 외환위기의 긴 터널을 빠져나온 사원들이 십시일반 정성을 모아 이같은 글귀가 담긴 노사상생의 역사적 기념비를 올 봄 회사 입구에 세운 것이다. 사원들은 출퇴근할 때마다 이 기념비를 습관처럼 바라보며 '노사불이'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있다. 이 회사는 설립된지 10여년 동안 이렇다할 매출신장 한번 이루지 못한채 외환위기를 맞았다. 당연히 공장의 생산라인 절반 이상은 멈춰섰고,인력 구조조정 없이는 회생 자체가 불가능한 형국이었다. 하지만 회사측은 오히려 자포자기에 빠져 있던 직원들에게 "노사가 하나로 뭉치면 일어설 수 있다"며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노조도 고통분담에 동참하며 회사살리기에 나섰다. 사원들의 임금을 스스로 반납하고 생산성 향상에 총매진한 것. 이러한 노사불이 정신은 인력구조조정보다 훨씬 큰 효과를 가져 왔다. 이 회사에 신노사문화를 꽃피우는 계기가 됐다. 당장의 가시적인 효과는 회사에서 생산되는 도료 제품에서 불량률이 완전히 사라졌다. 지난 2002년에는 무재해 1천5백일을 달성하는 등 재해예방에도 높은 시너지 효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노력은 회사가 올들어 국내 최초로 생활 가전,휴대폰,통신기기 등의 플라스틱 패널에 사용되는 항균 페인트를 개발하는 원동력으로 이어졌다. 회사측은 분기별 경영설명회와 연2회 경영실적 발표회,전직원 정기조회 등을 통해 근로자들이 땀흘려 이룬 성과를 낱낱이 공개하면서 근로자들의 사기를 드높였다. 또한 사내 인트라넷에 마련된 경영자 방을 통해 회사운영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고,사원들은 생생한 목소리로 회사에 불만을 토로할 수 있게 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열린 경영,투명 경영시스템으로 귀결됐다. 이 회사의 사원과 경영진간 관계는 가족처럼 돈독한 것으로 주변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노조는 외환위기 이후 회사 경영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크게 개선되자 2001년부터는 아예 임단협 교섭권을 회사에 일임해 4년연속 무교섭 타결을 이뤄내고 있다. 회사가 철저한 성과배분과 사내복지,열린 경영 등으로 끈끈한 가족 문화의 전통을 이어가는데 임단협에 많은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노조의 기본 생각이었다. 이는 고스란히 회사의 눈부신 발전과 함께 근로자들의 주머니를 두텁게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98년 2백74억원이던 매출액은 2003년 7백20억원,올해는 8백20억원(예상)으로 연평균 매출이 1백억원씩 불어나고 있다. 회사는 지난2002년과 2003년 임금총액의 15%에 해당하는 3백%의 성과금과 격려금을 사원들에게 지급했다. 황의석 노조위원장은 "시대는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노사문화는 아직도 변화를 꺼려하는 성격이 강하다"면서 "이젠 근로자들의 삶의질 향상에 보다 많은 관심을 둬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회사와 협의해 해외여행을 가는 장기근속자 대상을 기존 30년에서 20년으로 대폭 줄였고,지난해는 2억원 규모의 사내 근로복지기금을 설립하는 등 '웰빙 노조'건설에 눈코뜰새없이 바쁘다. 애경피앤씨는 상생의 노사협력을 원천으로 올해부터 중국과 베트남의 도료시장 선점에 본격 나서 세계적인 도료 전문 제조업체로 도약한다는 목표다. 유은재 사장은 "일맛나는 일터를 만들기 위해 사원들은 물론 전 경영진이 서로를 우선 생각하는 양보와 배려,역지사지의 철학이 몸에 배어있다"고 말했다. 포항=하인식 기자 ha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