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원남동 보령그룹 사옥 대강당에는 매달 한번씩 생일축하 노래가 울려퍼진다. 바로 '보령생일 조찬회'다. 그 달에 생일을 맞은 보령그룹 사원들에게 김승호 회장(73)이 직접 선물을 나눠주며 축하해준다. 김 회장은 79년부터 시작된 이 행사에 25년간 단 한번도 빠지지않고 참석해 왔다. 행사를 처음 제안한 것도 김 회장이었다. 생일조찬회는 단순한 축하행사로 끝나지 않는다. 생일을 맞은 주인공들이 회장에게 경영과 관련한 의견을 털어놓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날만은 보고나 결재도 생략된다. 김 회장의 '공존공영'과 '열린 경영' 철학이 조찬회에서 그대로 묻어나오는 것이다. 요즘같이 어려운 때일수록 김 회장의 경영스타일은 더욱 빛을 발한다. 올 매출은 보령제약이 2천억원,그룹 전체로는 3천5백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지난해보다 25% 정도 늘어난 것이다. 계열사인 보령메디앙스의 제대혈 은행을 비롯한 제약외사업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고,겔포스 등 주력 제품들도 제 몫을 해주고 있다. 토털헬스케어기업으로 거듭나면서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는 보령그룹의 김 회장을 집무실에서 만나봤다. "제약은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사업입니다. 회사와 직원이 한마음이 되어 고객의 신뢰를 받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지요. 저를 믿고 그동안 묵묵히 따라준 직원들이 고마울 뿐입니다." 보령의 역사는 1957년 보령약국 개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육군 중위로 4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제대한 김 회장은 종로5가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형을 도우면서 약과 인연을 맺었다. 김 회장은 밤낮으로 약국 일을 거들면서 약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쌓아나갔다. 거기서 김 회장은 자신의 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자신의 힘으로 약국을 개업하는 것이었다. 형의 약국에서 5개월여를 보낸 그 해 가을,김 회장은 마침내 자립을 결심했다. 그는 군생활을 하면서 근근이 마련한 돈암동의 집을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 돈을 손에 쥔 그는 약국을 개업할 장소를 찾아 서울 각지를 돌아다녔다. "어느 날 종로5가를 지나던 중 한 허름한 문방구가 시선을 끌더군요. 건물은 낡았지만 동대문시장과 버스터미널을 옆에 두어 입지가 좋았습니다. 바로 여기다 싶었지요." 김 회장은 그 건물에 점포를 얻고 약국 간판을 내걸었다. 오늘날의 보령제약을 있게 한 보령약국의 출발이었다. 약사 출신도 아니고 사업경험도 없던 김 회장이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패기와 성실'이었다. 그는 철저한 서비스 정신으로 약국을 경영했다. 손님이 찾는 약이 없으면 온 시내를 뒤져서라도 구해주었다. 당시 폭리를 취하던 관행을 깨고 적절한 이윤을 붙여 팔았다. 손님들이 내부 상황을 훤히 볼 수 있도록 오픈진열대도 마련했다. 이에 힘입어 보령약국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개업 5년 만인 62년 보령약국은 국내 최대 소매약국으로 성장했다. "약국 안은 항상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종로5가를 지나는 사람 5명 중 하나는 보령약국 손님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였지요." 김 회장은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당시 국내 의약품 시장은 과도기를 맞고 있었다. 의약품 국산화 물결이 일기 시작했지만 아직 국내 수준은 한참 뒤떨어져 있었다. 이에 따라 정부가 제약회사에 대한 지원에 발벗고 나섰다. 그는 지금이 제약업에 진출할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도산 위기에 빠져있던 부산 동영제약을 인수,제약업에 뛰어들었다. 보령약국 근처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자신의 집에 설비를 들여 공장을 차린 그는 64년 1월 첫 제품인 '오렌지 아스피린'을 내놨다. 보령약국을 통한 판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잇달아 내놓은 'APC''산토닌정' 등 가정 상비약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시장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김 회장은 뭔가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66년 2월 동영제약을 보령제약으로 바꾸고 직원들과 함께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서울 성수동에 새 공장을 준공하고 신제품 개발에 착수했다. 생약제제에 관심을 기울이던 김 회장은 일본에서 수입되던 '용각산'에 주목했다. 용각산은 해방 후 공급이 끊겨 밀수를 통해 거래되고 있었다. 김 회장은 일본 용각산사와 기술제휴를 맺고 67년 용각산을 내놨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용각산은 1년도 채 안돼 15만갑 판매 기록을 세웠다. 그 해 보령제약은 전년 대비 3배나 성장했다. 72년 보령제약은 또 하나의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냈다. 프랑스 비오테락스사와의 기술제휴로 만든 국내 최초 일회용 액체 위장약 '겔포스'가 바로 그것이다. 겔포스는 시장에 나오자마자 돌풍을 일으켰다. 생산 첫해 6천여만원에서 4년 후인 79년에는 매출이 무려 10억원에 이르렀다. '길거리에 나가면 어디서나 겔포스 껍질을 밟을 수 있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김 회장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77년 여름 30년 만의 집중호우로 안양공장이 물에 잠긴 것이었다. 값비싼 생산시설과 제품이 진흙범벅이 됐고 약품원료와 자재까지 못쓰게 됐다. 피해액은 당시 돈으로 12억원에 달했다. 그러나 김 회장과 직원들은 용기를 잃지 않았다. 김 회장은 작업복을 입고 직원들과 함께 몸소 복구작업을 벌였다. 정부에서도 긴급 융자금을 지원해줬고,각지로부터 성금이 줄을 이었다. 복구에 1년이 걸릴것이라던 피해조사단의 예상을 깨고 4개월 만에 복구를 끝냈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보령은 중앙연구소를 설립하고 신약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고혈압 치료제 '캡토프릴'과 항암제 'BR-8702'는 중앙연구소의 대표적 성과였다. 93년 보령제약은 중국에 겔포스를 수출하면서 세계시장 공략에 나섰다. 자회사 보령메디앙스(당시 보령장업)는 젖꼭지 '누크',스킨케어 '누크 베이비' 등을 선보이며 유아용품 시장을 선도해 나갔다. 김 회장은 바이오 연구개발 회사인 '보령바이오파마',건강기능식품 전문회사 '㈜보령',종합 커뮤니케이션 회사 '킴즈컴',정보통신 전문회사 'BR네트콤' 등을 잇달아 설립,6개 계열사를 둔 중견그룹으로 키워냈다. 김 회장은 요즘 2010년까지 1조원 매출을 목표로 내건 '2010프로젝트'로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차세대 고혈압 치료제인 'BR-A-657'은 2008년 상용화를 목표로 임상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일본에서 들여온 고혈압 치료제 '시나롱'은 올해 2백억원의 매출을 올릴 전망이다. 최근엔 나이지리아에 장티푸스 백신 1백만 도스를 수출키로 계약을 체결했다. 겔포스엠,용각산 등 간판 상품의 마케팅도 대폭 강화할 계획이다. 김 회장은 99년 사옥 로비에 '21세기 보령'의 꿈을 담은 타임캡슐을 설치했다. 그는 2005년 1월 1일 타임캡슐을 다시 열어볼 예정이다.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타임캡슐을 바라보며 새롭게 각오를 다집니다. 새벽마다 새 마음으로 보령약국의 셔터를 올렸듯이 말이지요." 임도원 기자 van769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