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처럼 살아 여왕됐지요"‥개인규모 美최대 갤러리 운영 이기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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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간 세 시간밖에 못 잔 적도 많았습니다. 열정 없이 이룰 수 있는 건 없잖아요. 정말 '미쳐야 미친다'고 학기말 시험공부하듯 매순간 최선을 다했죠.결국 자기가 흘린 땀만큼 거두는 것 같습니다."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튼에서 대규모 화랑 윈드갤러리를 운영하는 사업가 겸 세계적인 큐레이터 이기희씨(51).
두 번의 국제결혼과 한 번의 사별,다운증후군에 걸린 딸 등 드라마 같은 인생 굴곡을 딛고 미국 상류사회에서 인정받는 예술가이자 사업가로 우뚝 선 한국 여성.그가 자전에세이 '여왕이 아니면 집시처럼'(도서출판 휴먼앤북스) 출간을 계기로 한국에 왔다.
대구 계명대 국문과 시절 이창동 전 문화부장관 등과 '주변문학' 동인으로 문인의 꿈을 키우고 '시문학'을 통해 등단한 그는 주한 미국 공보관 부인의 한국어 개인교사가 된 것을 계기로 대학 4학년 때 미국독립기념일 파티에서 18세 연상의 미군 보급사령관 제임스 버드월스 육군 대령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졸업 후 잠시 교편을 잡던 그는 버드월스 대령과 결혼했다.
그러나 다운증후군에 선천성 심장기형까지 겹친 딸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다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갔지만 남편이 식도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 때 저는 서른살이었습니다.영구 귀국을 결심했죠.그런데 한국으로 짐까지 부친 상황에서 중국음식점 주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재혼했어요."
중국 레스토랑은 날로 번창해 곧 7개의 체인점을 갖게 됐고 딸과 아들도 더 생겼다.
대저택까지 소유한 부자가 됐지만 그의 꿈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화가가 된 그는 윈드갤러리를 운영하면서 화랑가의 큰손으로 변신했다.
2년 전에 세운 2천7백여평 규모의 창작예술센터까지 합쳐 그의 개인 갤러리는 약 5천평.미국 전역에서 손꼽히는 규모다.
"처음 미국갈 때 미국은 한국의 50배나 되는 나라니 남들이 한발자국 디딜 때 난 50발자국 떼어야 한다고 마음 먹었죠.지금도 1인 8역 정도로 바쁘지만 늘 그 때의 마음가짐을 잊지 않습니다."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