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하루는 주요 기업 기획실 직원들에게 무척 고달픈 날이었다. 내년도 사업계획 작성에 여념이 없는 이들에게 전날 세 건의 놀라운 뉴스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당초 예정됐던 내년도 경제전망 발표를 미뤄버렸고 이해찬 총리는 헌법재판소의 신행정수도 특별법 위헌 결정에 따라 수도권 규제 완화정책을 백지화할 수도 있다는 뜻을 밝혔다. 중국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전격 인상했다는 외신도 날아들었다. 사안 별로 검토의견을 달아 사업계획에 반영하기에는 파장이 너무도 큰 것들이었다. 특히 금리인상으로 현실화되기 시작한 중국의 긴축정책은 중국 사업비중이 높은 기업들에게 매출과 수익 지표를 전면 수정해야하는 부담을 안겨주었다. 재계는 고유가.저환율 기조로 가뜩이나 채산성 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시기에 국내외 악재들이 속속 돌출하자 당황하고 있다. 삼성그룹의 "2005년 경영방침"이 보도된 지난 22일,모 대기업 기획실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삼성 계열사에 시달된 경영방침 원문을 구해줄 수 있겠느냐는 요청이었다. "내년 경영환경을 도무지 예측할 수 없어 사업계획 수립에 애를 먹고 있다"며 "명실상부한 재계 1위 삼성의 자료를 참고하고 싶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정작 삼성도 이달 말로 예정된 내년도 사업계획 확정 시점을 며칠 앞두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실물경제의 부담요인들도 만만찮은 상황에서 정치권의 대격돌에 따른 정국 불안과 신행정수도 건설 무산에 따른 수도권 규제의 강화 움직임 등이 예측조차 하기 어려운 변수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삼성 관계자는 "일단 미래지향적으로 경영방침을 수립했지만 올해 양호한 경영실적을 내년까지 이어가기에는 지나치게 불확실한 요인들이 많다"며 "국책연구기관 마저 경제전망을 포기한 상황 아니냐"고 반문했다. KDI의 경제전망 발표 포기는 자체 연구기관을 갖고 있지 않는 대다수 기업에겐 그 자체로 큰 충격이다. 10대 그룹의 한 관계자는 "해마다 KDI의 3분기 전망치를 토대로 이듬해 사업계획을 수립해왔는데 이번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또 이해찬 총리가 삼성 LG의 사례를 들며 수도권 규제완화 재검토 방침을 밝힌 것도 기업들에겐 맥 빠지는 소리다. 거명된 기업들은 29일 내내 총리 발언의 진의파악에 골몰하며 아까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해당기업 관계자는 "기업투자의 목줄을 쥐고 있는 정책이 이런 식으로 오락가락 해서야 어떻게 미래를 위한 투자를 설계하겠느냐"고 볼멘 소리를 했다. 기업들은 여기에다 국가보안법 철폐문제를 포함한 이른바 "4대 개혁법안 입법"과 금융계열사의 의결권 축소를 골자로 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놓고 여야가 격렬하게 대치하는 현 상황도 경영의 큰 걸림돌이라고 호소한다. 정국 불안과 타협없는 정치권의 대립이 국가위상과 기업 신인도의 동반 하락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에 따른 것이다. 안재욱 경희대 교수는 "정책의 일관성이 없는 상태에서 공정거래법 개정안처럼 기업활동을 제한하는 쪽으로 정책이 흘러가면 성장과 투자는 위축될 수 밖에 없다"며 "정부는 위기요인을 내부에서 찾아 종합적인 치유책을 마련해야한다"고 지적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