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CEO 열전] (14) 최지성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 총괄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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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7월,경기도 용인에 있는 삼성그룹 연수원 대강당.4주간의 신입사원 연수가 끝나 "새내기"들이 돌아가며 소감을 말하는 시간이었다.
번쩍 손을 들고 일어선 한 신입사원의 얘기는 연수원장의 귀를 의심케할 정도로 당돌했다.
"솔직히 말해서 삼성의 신입사원 교육에 실망했습니다. 경쟁 그룹인 현대에선 정주영 회장까지 직접 나와 신입사원들과 씨름을 하는 등 스킨쉽을 다진다는데,우리는 이게 뭡니까. 이렇게 무성의해도 되는 겁니까?" 강당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구대장과 교육 조교들은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지만 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신입사원 교육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갔다.
그로부터 27년 뒤인 2004년 3월,이 당찬 청년은 삼성전자의 4대 사업부중 하나인 디지털미디어부문의 총괄사장으로 선임된다.
그가 바로 최지성(崔志成-53) 사장이다.
당시 조교를 맡았던 김인 삼성SDS 사장이 그 때 일을 떠올리며 축하 전화를 했다.
"세상 참 모를 일이야.일년도 다니지 못할 줄 알았던 자네가 사장까지 올랐으니 말이야."
최 사장은 강원도 삼척시 사직동이 본관으로 경북 울진 근처에서 태어났다.
춘천중학교를 졸업한 뒤 춘천고를 1년 정도 다니다가 서울로 오기 위해 다시 서울고 시험을 봤다.
학창시절 별명은 딸깍발이였다.
'딸깍발이'는 원래 '남산골 샌님'의 별칭으로 꼬장꼬장한 자존심에 아무리 추워도 곁불은 쬐지 않는다는 지조를 갖고 있던 선비들을 가리키는 말."제가 어릴 때부터 고집이 셌거든요.
거기에다 매사에 잘 따지고 들었어요."
71년 서울대 무역학과에 들어갔지만 '딸깍발이'의 대학 생활은 순탄할 수가 없었다.
당시는 박정희 정권시절.그는 유신타도 등을 외치며 데모에 나섰다가 일찌감치 공안당국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그는 ASP(Anti Government Student Power)라는 군 당국의 블랙 리스트에 올랐다.
고생길에 들어선 것은 당연지사.
원주 38사단 신병훈련소를 마치고 나온 그는 전차병 주특기를 받아 전남 장성군의 제 11전차 대대에 배속됐다.
한겨울 혹한훈련을 나가 M46이나 M47 같은 미제 탱크 안에서 덜덜 떨며 갖은 고생을 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뒤에는 끓는 피를 억제하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은 약해지지 않았지만 개인적인 한계가 느껴졌습니다.
앞으로 무엇이 될지 모르지만 일단 미래를 위해 준비를 하자고 정리를 했던 것 같아요."
바로 그랬던 그가 삼성그룹 신입사원 연수에서 '사고'를 친 것이었다.
하지만 일류를 지향하는 삼성이 몇 마디 쓴소리에 신입사원의 합격을 취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1,2,3지망 모두 삼성물산을 써내 삼성물산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이쑤시개 귀이개 따위에서 신발 문구 주방용기 등을 파는 잡화과가 첫 근무부서였다.
최 사장보다 입사는 빨랐지만 서울고 1년 후배였던 황영기씨(우리금융 지주회사 회장)가 "제가 피혁과에 있으니 형은 잡화과를 지망해보라"고 권유한 데 따른 것이었다.
종합상사 업무는 고단했다.
일은 끝도 없이 밀려들었고 해외시장은 갈수록 커졌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그는 적극적이었고 능동적이었다.
그 시절 별명은 '독일병정'.자로 재듯 정확한 일솜씨와 절도 있는 생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81년 말 그룹 비서실 기획팀으로 발령이 났다.
비서실은 예나 지금이나 삼성의 심장부.중장기 계획을 세우고 해외지사를 관리하며 각종 신규사업의 타당성을 눈코 뜰새 없이 검토해야 했다.
85년 1월 삼성은 최 사장을 삼성반도체통신(현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부문)에 투입했다.
그룹은 반도체를 차세대 신수종 사업으로 정하고 엘리트 요원들을 삼성반도체통신에 쏟아붓고 있었다.
최 사장 개인에게도 직장생활의 전환점이었다.
"야,그냥 비서실에 있지.왜 고생을 사서 하느냐"(당시 삼성반도체통신의 홍종만 관리본부장)는 얘기를 듣기도 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1인 사무소장으로 나갔다.
물산 근무 시절 유럽에 신발을 팔던 경험을 십분 활용해보라는 지시였다.
처음 독일에 들어온 날,한 박스에 64K D램 칩 1만개가 들어있는 박스 3개가 도착해 있었다.
삼성물산 프랑크푸르트 현지법인에 마련된 책상 하나가 그의 '사무소'였다.
어디서부터 영업을 시작해야할지 몰라 한숨만 길게 나왔다.
현지 전화번호부에서 '전자'와 'PC'라는 상호만 나오면 무조건 찾아갔다.
이때부터 그의 별명은 '유럽의 보부상(褓負商)'으로 다시 바뀌었다.
영업은 상상을 초월하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한번 길을 나서면 왕복 1천2백km가 넘는 여정이 다반사였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파리(프랑스)나 이탈리아 토리노시 인근의 이브레아로 가는 출장이 특히 잦았다.
저녁 9시께 출발해 밤새도록 달리면 아침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비즈니스 시간대에 사람들을 만나 업무를 보고 저녁에 다시 차를 몰아 독일로 돌아오는 생활이 반복됐다.
무박 2일짜리 출장이었던 셈이다.
운전 중에 졸리는 것이 겁나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에스프레소'라는 독한 커피를 상복하며 운전을 했다.
86년 12월 21일엔 이탈리아에 가기 위해 알프스산맥을 넘던 중 차가 눈길에 미끄러져 반파되는 사고를 당했다.
스위스와 이탈리아 국경을 관통하는 연장 15km짜리 그랑상버나디드 터널을 통과하자마자 벌어진 일이었다.
"전차병 훈련을 받으면서 배웠던 안전운전 교육이 저를 살렸습니다.
순간적으로 차를 터널 벽쪽으로 돌리지 않았더라면 1백50m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고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해가 바뀌어 1월17일 프랑스 앙제의 톰슨공장으로 가는 길에서 또다시 대형사고를 당했다.
시속 40km 정도로 달리던 2단 트레일러를 추월하기 위해 차선을 바꾸는 순간 가속을 받은 차가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트레일러로 빨려 들어간 것.
결사적으로 핸들을 꺾어 보니 옆은 한길 밑의 밭이었다.
차는 완파됐지만 몸은 약간의 찰과상을 빼고 멀쩡했다.
놀라서 돌아올 법도 했지만 최 사장은 그 몸으로 기어이 톰슨을 찾아갔다.
이 같은 각고의 노력 덕분이었는지 최 사장은 85년 첫해 혼자서 1백만달러어치의 반도체를 팔았다.
이듬해는 5백만달러,그 이듬해는 2천5백만달러,또 그 이듬해는 1억2천5백만달러어치를 팔아 매년 5백%씩 판매를 신장시켰다.
물불을 가리지 않던 강인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91년 귀국명령이 떨어졌다.
삼성전자의 관리팀장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영업 출신으론 최초의 관리팀장이었다.
그는 이미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의 핵심이었고 그 대접을 받았다.
95년엔 메모리반도체 영업이사로 승진했다.
상무,전무 시절에도 반도체 영업 외곽을 철통같이 지켰다.
98년9월 디스플레이 사업부장이 된 이후에도 그의 스타일은 변하지 않았다.
딸깍발이처럼 철저하게 원칙을 고수했고 독일병정처럼 매사에 정확했으며 보부상처럼 능동적이었다.
그가 맡은 디지털미디어 총괄사업부는 올해 19조원의 매출을 바라볼 정도로 급성장했다.
돌이켜 보면 최 사장은 지난 25년여의 직장생활 내내 영업-기획-관리를 오가며 기동타격대처럼 살았다.
자신이 어떤 일을 원하기 전에 회사가 먼저 그를 원했고 그는 조직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최 사장은 "최선을 다하지 않는 젊음은 방종에 지나지 않는다"며 "숱한 밤길을 달려 알프스를 넘어갔던 열정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우 이선우 유두현 구자현 원선희씨 등 그와 함께 유럽 판매망을 키운 사람들은 모두 삼성전자의 중역이 돼 있다.
조일훈.장경영 기자 jil@hankyung.com
번쩍 손을 들고 일어선 한 신입사원의 얘기는 연수원장의 귀를 의심케할 정도로 당돌했다.
"솔직히 말해서 삼성의 신입사원 교육에 실망했습니다. 경쟁 그룹인 현대에선 정주영 회장까지 직접 나와 신입사원들과 씨름을 하는 등 스킨쉽을 다진다는데,우리는 이게 뭡니까. 이렇게 무성의해도 되는 겁니까?" 강당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구대장과 교육 조교들은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지만 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신입사원 교육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갔다.
그로부터 27년 뒤인 2004년 3월,이 당찬 청년은 삼성전자의 4대 사업부중 하나인 디지털미디어부문의 총괄사장으로 선임된다.
그가 바로 최지성(崔志成-53) 사장이다.
당시 조교를 맡았던 김인 삼성SDS 사장이 그 때 일을 떠올리며 축하 전화를 했다.
"세상 참 모를 일이야.일년도 다니지 못할 줄 알았던 자네가 사장까지 올랐으니 말이야."
최 사장은 강원도 삼척시 사직동이 본관으로 경북 울진 근처에서 태어났다.
춘천중학교를 졸업한 뒤 춘천고를 1년 정도 다니다가 서울로 오기 위해 다시 서울고 시험을 봤다.
학창시절 별명은 딸깍발이였다.
'딸깍발이'는 원래 '남산골 샌님'의 별칭으로 꼬장꼬장한 자존심에 아무리 추워도 곁불은 쬐지 않는다는 지조를 갖고 있던 선비들을 가리키는 말."제가 어릴 때부터 고집이 셌거든요.
거기에다 매사에 잘 따지고 들었어요."
71년 서울대 무역학과에 들어갔지만 '딸깍발이'의 대학 생활은 순탄할 수가 없었다.
당시는 박정희 정권시절.그는 유신타도 등을 외치며 데모에 나섰다가 일찌감치 공안당국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그는 ASP(Anti Government Student Power)라는 군 당국의 블랙 리스트에 올랐다.
고생길에 들어선 것은 당연지사.
원주 38사단 신병훈련소를 마치고 나온 그는 전차병 주특기를 받아 전남 장성군의 제 11전차 대대에 배속됐다.
한겨울 혹한훈련을 나가 M46이나 M47 같은 미제 탱크 안에서 덜덜 떨며 갖은 고생을 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뒤에는 끓는 피를 억제하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은 약해지지 않았지만 개인적인 한계가 느껴졌습니다.
앞으로 무엇이 될지 모르지만 일단 미래를 위해 준비를 하자고 정리를 했던 것 같아요."
바로 그랬던 그가 삼성그룹 신입사원 연수에서 '사고'를 친 것이었다.
하지만 일류를 지향하는 삼성이 몇 마디 쓴소리에 신입사원의 합격을 취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1,2,3지망 모두 삼성물산을 써내 삼성물산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이쑤시개 귀이개 따위에서 신발 문구 주방용기 등을 파는 잡화과가 첫 근무부서였다.
최 사장보다 입사는 빨랐지만 서울고 1년 후배였던 황영기씨(우리금융 지주회사 회장)가 "제가 피혁과에 있으니 형은 잡화과를 지망해보라"고 권유한 데 따른 것이었다.
종합상사 업무는 고단했다.
일은 끝도 없이 밀려들었고 해외시장은 갈수록 커졌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그는 적극적이었고 능동적이었다.
그 시절 별명은 '독일병정'.자로 재듯 정확한 일솜씨와 절도 있는 생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81년 말 그룹 비서실 기획팀으로 발령이 났다.
비서실은 예나 지금이나 삼성의 심장부.중장기 계획을 세우고 해외지사를 관리하며 각종 신규사업의 타당성을 눈코 뜰새 없이 검토해야 했다.
85년 1월 삼성은 최 사장을 삼성반도체통신(현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부문)에 투입했다.
그룹은 반도체를 차세대 신수종 사업으로 정하고 엘리트 요원들을 삼성반도체통신에 쏟아붓고 있었다.
최 사장 개인에게도 직장생활의 전환점이었다.
"야,그냥 비서실에 있지.왜 고생을 사서 하느냐"(당시 삼성반도체통신의 홍종만 관리본부장)는 얘기를 듣기도 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1인 사무소장으로 나갔다.
물산 근무 시절 유럽에 신발을 팔던 경험을 십분 활용해보라는 지시였다.
처음 독일에 들어온 날,한 박스에 64K D램 칩 1만개가 들어있는 박스 3개가 도착해 있었다.
삼성물산 프랑크푸르트 현지법인에 마련된 책상 하나가 그의 '사무소'였다.
어디서부터 영업을 시작해야할지 몰라 한숨만 길게 나왔다.
현지 전화번호부에서 '전자'와 'PC'라는 상호만 나오면 무조건 찾아갔다.
이때부터 그의 별명은 '유럽의 보부상(褓負商)'으로 다시 바뀌었다.
영업은 상상을 초월하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한번 길을 나서면 왕복 1천2백km가 넘는 여정이 다반사였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파리(프랑스)나 이탈리아 토리노시 인근의 이브레아로 가는 출장이 특히 잦았다.
저녁 9시께 출발해 밤새도록 달리면 아침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비즈니스 시간대에 사람들을 만나 업무를 보고 저녁에 다시 차를 몰아 독일로 돌아오는 생활이 반복됐다.
무박 2일짜리 출장이었던 셈이다.
운전 중에 졸리는 것이 겁나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에스프레소'라는 독한 커피를 상복하며 운전을 했다.
86년 12월 21일엔 이탈리아에 가기 위해 알프스산맥을 넘던 중 차가 눈길에 미끄러져 반파되는 사고를 당했다.
스위스와 이탈리아 국경을 관통하는 연장 15km짜리 그랑상버나디드 터널을 통과하자마자 벌어진 일이었다.
"전차병 훈련을 받으면서 배웠던 안전운전 교육이 저를 살렸습니다.
순간적으로 차를 터널 벽쪽으로 돌리지 않았더라면 1백50m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고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해가 바뀌어 1월17일 프랑스 앙제의 톰슨공장으로 가는 길에서 또다시 대형사고를 당했다.
시속 40km 정도로 달리던 2단 트레일러를 추월하기 위해 차선을 바꾸는 순간 가속을 받은 차가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트레일러로 빨려 들어간 것.
결사적으로 핸들을 꺾어 보니 옆은 한길 밑의 밭이었다.
차는 완파됐지만 몸은 약간의 찰과상을 빼고 멀쩡했다.
놀라서 돌아올 법도 했지만 최 사장은 그 몸으로 기어이 톰슨을 찾아갔다.
이 같은 각고의 노력 덕분이었는지 최 사장은 85년 첫해 혼자서 1백만달러어치의 반도체를 팔았다.
이듬해는 5백만달러,그 이듬해는 2천5백만달러,또 그 이듬해는 1억2천5백만달러어치를 팔아 매년 5백%씩 판매를 신장시켰다.
물불을 가리지 않던 강인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91년 귀국명령이 떨어졌다.
삼성전자의 관리팀장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영업 출신으론 최초의 관리팀장이었다.
그는 이미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의 핵심이었고 그 대접을 받았다.
95년엔 메모리반도체 영업이사로 승진했다.
상무,전무 시절에도 반도체 영업 외곽을 철통같이 지켰다.
98년9월 디스플레이 사업부장이 된 이후에도 그의 스타일은 변하지 않았다.
딸깍발이처럼 철저하게 원칙을 고수했고 독일병정처럼 매사에 정확했으며 보부상처럼 능동적이었다.
그가 맡은 디지털미디어 총괄사업부는 올해 19조원의 매출을 바라볼 정도로 급성장했다.
돌이켜 보면 최 사장은 지난 25년여의 직장생활 내내 영업-기획-관리를 오가며 기동타격대처럼 살았다.
자신이 어떤 일을 원하기 전에 회사가 먼저 그를 원했고 그는 조직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최 사장은 "최선을 다하지 않는 젊음은 방종에 지나지 않는다"며 "숱한 밤길을 달려 알프스를 넘어갔던 열정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우 이선우 유두현 구자현 원선희씨 등 그와 함께 유럽 판매망을 키운 사람들은 모두 삼성전자의 중역이 돼 있다.
조일훈.장경영 기자 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