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의 최고 작가이자 평론가로 활동 중인 조란 지브코비치의 장편소설 '책 죽이기'(문이당,원제 The Book)가 국내 처음으로 번역돼 나왔다. '책 죽이기'는 지구상에서 가장 지적인 존재이면서도 제대로 된 대접 한번 받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해야 하는 책의 일생을 유머러스하게 그린 작품이다. 책의 운명을 좌우하는 출판사 사장,문예대행인,편집자,인쇄소,서적상 등이 만들어 내는 책과 관련된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특히 그 내용들이 우리의 출판 현실과 유사한 점이 많아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묘미는 독자들로 하여금 시종일관 미소짓게 하고 때로는 배꼽을 잡게 만드는 기발한 착상에 있다. 작가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약자인 여성으로 책을 의인화함으로써 책이 온갖 수모를 겪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코믹하면서도 실감나게 그려낸다. 잠자리에서 책을 보다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잠드는 사람들의 행태를 풍자한 대목이라든지,자본주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상품 가치가 우선일 수밖에 없는 책의 현실을 꼬집는 부분이 좋은 예다. 작가와 출판사의 관계를 남자와 여자의 구도로 설정해 '경쾌한 외설'의 형식으로 보여주는 점도 재미있다. 독자들이 책을 사기 위해 서점에서 책을 뒤적거리는 행위라든지,책을 읽고 난 다음 주위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모습을 그린 장면은 노골적이지 않으면서도 재미있는 '외설 표현'의 전형이다. 1948년 베오그라드에서 태어난 지브코비치는 93년 '네번째 원'으로 문단에 데뷔했으며 지난해 '도서관'으로 세계 판타지상을 수상했다. 김재창 기자 char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