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출신 당나라 고선지(高仙芝.?∼755년)장군에 대한 국내 학계의 역사적 평가가 새롭게 조명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고선지 장군은 유럽의 알렉산더대왕에 버금가는 군사 전략가이면서도 그동안 중국史와 국내 학계에서 그다지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던 인물로 알려져 왔다. 영국의 고고학자로 파미르고원을 세차례 답사한 스타인卿은 "고선지야말로 나폴레옹과 한니발을 능가하는 최고의 장군"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인하대 중앙아시아 학술조사단(단장. 인하대 박물관 학예사 윤용구박사)은 지난달 21일∼31일 고선지 장군의 발자취를 찾는 답사에서 당나라와 아랍연합군간 최초의 전투현장인 탈라스를 찾아냈다. 탈라스 전투는 세계사의 획을 긋는 동서(東西)문명의 대충돌을 알리는 대전투이지만, 전쟁터의 위치를 몰라 그 의미가 그동안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학계에서는 '키르키스탄' 탈라스 전투현장의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해 단지 '카자흐스탄'으로 잘못 표기해왔다. 탈라스는 대평원에서 산맥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해당되고, 사통팔달 교통요충지이어서 당시 탈라스의 장악은 중앙아시아 내륙 전지역을 손안에 넣는 키(Key)포인트이다. 고선지 장군은 740∼750년 4차례의 서역(西域)정벌을 통해 파키스탄의 길기트(당시 소발률국)와 석국(石國. 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市), 갈사국(사마르칸트市)등 72개국을 점령, 실크로드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부상했다. 고선지 장군은 톈샨(天山)산맥과 파미르고원을 넘어 751년 카자흐스탄과의 국경지대인 키르기스탄의 탈라스 대평원에서 압바스왕족의 이슬람세력인 30만대군의 아랍연합군과 최초의 동서양 전투를 벌여 참패한다. 이 전투에서 고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는 전체 7만여명의 군사중 5만여명이 전사하고, 2만여명이 포로로 잡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하대 학술조사단은 국내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탈라스 전투현장이 지난해 키르키스탄 아카데미에 의해 처음 발견된 사실을 확인했다. 치열한 탈라스 전투의 현장에서 숨진 병사들의 무덤(쿠르간) 200여기가 발견됐다. 길이 8m∼10여m의 타원형 모양의 무덤은 흙이 아닌 강(江)자갈로 덮여 있으며,무덤에서 화살촉과 투구, 검(劍), 갑주 등이 발굴돼 탈라스 마나스박물관에 소장돼있다. 탈라스 마나스박물관 연구원인 에밀 나르보다예프(37)씨는 "무덤에 묻힌 병사가당나라군인지 아랍군인지는 명확치 않지만, 탈라스 전투에 참가했던 병사들인 것만은 틀림없다"고 설명했다. 약관 20세에 당나라 장군의 반열에 오른 고선지 장군은 4차례에 걸친 서역정벌에서 승승장구, 안서도호부까지에 올랐으나, 결국 탈라스 전투 패배후 이어진 안록산의 난(亂)때 모함을 받아 참형을 당했다. 고선지 장군의 탈라스 전투는 그러나 세계사에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탈라스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당나라 군사들에 의해 종이만드는 기술(제지술)과화약제조술이 유럽에 처음 전파돼 신(神)중심의 유럽 사회를 인간중심의 인문학 사회로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탈라스 전투의 패배와 신기술의 유출은 결국 당나라의 패망과 서양문명의 발달을 가져오는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제지술은 1998년 우즈베키스탄에서 전통민속문화를 계승하려는 시민단체의복원활동이 시작되면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테르미즈 거리의 자리프 무크타로(IARIF MUHTARO.47)씨 집에선 뽕나무로 옛 제지생산법을 이용, 5∼6종류의 종이를 생산하고 있다. 무크타로씨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화가들이 주로 사용하고 있다"며 "일본과 유네스코에서 전통문화계승을 위한 재정지원을 하고 있으며, 한국와의 교류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윤용구박사는 "이번에 탐사에서 국내 최초로 고선지장군의 당나라와 아랍군간의격전지를 찾을 수 있게 됐다"며 "그동안 탈라스 전투의 중요성은 강조했어도 전쟁이탈라스市 어디인지는 제대로 소개되지 못해왔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고선지장군의 750년 서역정벌은 그동안 학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안서도호부 쿠차를 떠나 곧바로 타슈켄트로 향한 것이 아니라, 서남쪽 파미르고원의북쪽으로 진격해 페르가나 분지와 시르다리야 강을 거쳐 사마르칸트 일대를 정벌했다"며 "동북으로 톈산산맥의 서단으로 이어지는 타슈켄트를 정벌한뒤, 그 왕을 잡아쿠차로 귀환한 것"이라고 밝혔다. (타슈켄트=연합뉴스) 김명균 기자 km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