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적인 고안이나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대부분 중간관리자나 낮은 직급의 직원들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이를 지원하는 최고경영진의 노력 없이는 결코 혁신을 성공시킬 수 없다.


한국기업에선 최고경영자(CEO)가 아닌 팀장급이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는 한국경제신문과 모니터그룹의 설문조사 결과는 이 같은 의미에서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회사의 현황을 좁은 시각에서 파악하고 있는 실무담당자에게 기업의 미래를 맡기는 꼴이다.


CEO가 직접 나서 직원들의 창의성을 자극,혁신의 속도를 높이지 않는다면 혁신이 뿌리내릴 수 없다는 게 한경과 모니터그룹의 진단이다.


24일 오후 한국경제신문사 다산홀에서 열린 제1회 글로벌혁신포럼에는 최고경영자와 기업 및 정부부처 혁신담당 1백여명이 참석해 혁신에 대한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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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표적인 혁신기업인 3M에는 '15% 규칙'이란 유명한 제도가 있다.


연구인력의 경우 근무시간의 15%는 반드시 일상적인 일에서 벗어나 엉뚱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시간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일종의 불문율이다.


15% 규칙 덕분에 '포스트잇'을 비롯한 빅히트 상품이 탄생될 수 있었다.


3M 혁신에 기폭제 역할을 한 15% 규칙은 1907년 경리사원으로 입사해 1929년 마침내 사장에 오른 윌리엄 L 맥나이트의 경영철학에서 비롯됐다.


그는 재직기간 동안 직원들에게 '실험적인 바보짓'을 하라고까지 권장하며 혁신 친화적인 문화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윌리엄 맥나이트뿐 아니다.


앞서가는 기업에는 늘 혁신을 주도하는 최고 경영자가 있었다.


권위의식으로 가득찬 IBM에 창의성을 불어넣은 루 거스너 전 회장,연구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짜낼 때 가장 큰 행복을 느꼈던 빌 휴렛 HP 공동설립자 등이 그들이다.


이런 '혁신리더(innovation leader)' 기업들과 달리 '재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으로 고속성장을 이룩한 국내기업의 사정은 어떨까.


한국경제신문과 모니터그룹이 국내 주요기업 최고 경영자 1백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혁신리더 기업들과는 정반대의 양상이 나타났다.


응답 기업의 39%가 최고 경영진이 아닌 팀장급이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혁신이 임원진의 책임 아래에 있는 기업은 상당수 있었지만 최고 의사결정권자인 CEO가 직접 나서서 혁신을 챙기는 경우는 11%에 불과했다.


개선도 요원한 실정이다.


'5년 뒤쯤에는 CEO들이 직접 혁신을 챙길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67%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이날 행사에서 '성공적인 혁신을 위한 10가지 제안'을 주제로 발표한 모니터그룹 계열 IMI의 로널드 조내시 대표는 "한국 CEO의 혁신주도 비율은 브라질의 35%보다도 훨씬 낮은 수준"이라며 "이번 조사 결과는 혁신 리더 전략이 아직 한국 기업의 핵심전략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혁신에 대한 CEO의 참여와 관심이 저조한 것은 기업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혁신이 완전히 뿌리내리지 못하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절반가량(49%)의 한국 기업들이 '혁신수용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 구성원이 혁신을 위한 새로운 시도를 기대하기는 하지만 개개인이 적극적으로 변화를 주도하거나 이에 대비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구성원의 이 같은 소극적인 태도는 혁신적인 시도가 제대로 이행되는 것을 막고 조직의 학습속도를 저하시켜 혁신이 시행착오로 끝나는 결과를 낳기 쉽다.


한국기업의 혁신이 수동적인 단계에 머물다 보니 혁신성과에 대한 평가도 모든 직원이 아닌 관련 실무자 몇 명에게만 적용되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혁신 실무 담당자에게만 명확한 성과지표를 적용하는 기업은 47%에 달하는 반면 모든 구성원들에게 균형 성과표를 적용,혁신 실적을 측정하는 경우는 2%에 그쳤다.


최고 경영진 스스로가 혁신을 외면하는 현실과는 대조적으로 CEO들은 정작 '최고 경영자의 의지와 지원(78%)'을 혁신의 가장 큰 원동력으로 꼽았다.


특히 제조업체들은 금융기업이나 IT·벤처기업보다 혁신 수행에 있어 CEO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혁신을 이끄는 최고 경영자가 갖춰야 할 자질로는 '열정 및 추진력(16%)''명확한 목표와 비전(13%)''변화 및 혁신지향성(12%)'이 많이 거론됐다.


인재 및 조직관리능력,미래를 예측하는 혜안과 통찰력 등도 혁신리더십의 조건으로 꼽혔다.


히텐드라 파텔 IMI 파트너는 이날 포럼에서 혁신에 대한 CEO들의 기대수준과 현실의 괴리가 크게 벌어진 현 상황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처방을 내놨다.


특히 한국기업들이 혁신수용단계에서 벗어나 혁신주도단계로 발돋움하기 위해 최고 경영진이 즉시 실천할 수 있는 다양한 혁신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먼저 최고경영층 회의석상 아젠다에 혁신을 반드시 포함시킬 것을 주문했다.


혁신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이를 전략적 핵심과제에 포함시키기 위해서다.


고위 임원들이 적어도 하나의 혁신프로젝트를 후원하게 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도 내놨다.


제록스가 PC의 핵심기술을 먼저 개발하고도 경영진의 인식부족으로 주도권을 애플사에게 빼앗긴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설명이다.


조원홍 모니터그룹코리아 이사는 "기존 관행,전통 등에서 벗어난 새로운 사고,통찰을 장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혁신을 소수의 인재들만이 수행하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P&G처럼 일상의 업무로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날 행사에선 이밖에 좋은 아이디어를 개발하기 위해 10억원의 예산이 있다고 발표한다거나 고위임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혁신전문가들과 조찬회의를 가질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등 튀는 아이디어도 있었다.


추가적인 프로젝트를 줄이고 현재 연구소에서 진행되는 과제들의 시제품(프로토타입)을 요구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


송대섭 기자 dss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