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딸아이가 나를 벗어나 홀로 설 것이라는 사실을 두 번에 걸쳐 깨달은 적이 있다. 그 첫 번째는 어느 여름날 내 그림자가 딸에게 해를 가려줄 때였다. 아, 언젠가 아이가 훌쩍 커버려 내 그림자가 '해가리개'가 될 수 없을 때, 아이는 아비인 나한테서 자유로워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는 오랫동안 책을 읽어주어 왔건만 어느날 갑자기 자기 혼자 책을 읽겠다고 '선언'했던 순간이다. 나는 그때 비로소 딸아이와 이어져 있었던 정서적 탯줄이 끊겨 나가는 듯한 환시에 빠졌다. 나도 모르는 새 아이가 다 자라버린 것이다. 앞으로 내가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나는 아이에게 '억압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이제 더이상 그림자로 아이에게 쏟아지는 햇살도 막아주지 못하고 함께 책을 읽으며 가가대소하지도 못한다. 아이는 벌써 아비가 권하는 책보다 자기 스스로 책을 골라 읽으려 한다. 어느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보면 자랑스럽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읽어야할 책을 스스로 골라 탐독하니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이쁘기만 하다. 그러나 때로는 서점에서 사온 조악한 만화책을 보며 안타까워 한다. 만화라서 시비를 거는게 아니다. 이젠 만화를 악서 취급하는 부모는 거의 없다. 단지 공허한 내용과 형편없는 그림에 속이 상할 뿐이다. 그렇다고 못읽게 하지는 않는다. 이래뵈도 나는 전문가가 아니던가. 막아보아야 소용없을 뿐더러 굳이 막을 이유도 없다. 그 나이 때는 그것이 좋아보일 수도 있는 법이다. 그걸 못 보게 하기보다 다른 것도 읽게 하면 문제는 저절로 풀려나가게 되어 있다. 한동안 딸아이가 책에 멀어져 있을 때도 억지로 읽게 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단지 절제를 하도록 이끌었을 뿐이다. 텔레비전 보는 시간을 제한하고 인터넷은 주말에만 하도록 했다. 아이 엄마의 역할이 컸다. 엄마와 맺은 약속을 아이가 지키게 되면서부터 다시 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억지로 되지는 않는다. 평소 부모가 책읽는 모습을 보여주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아이들은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늘 문제는 '윗물'에 있는 법이다. 책의 선택권은 아이에게 있지만 부모 입장에서 권하고 싶은 책은 있게 마련이다. 나는 지금 그런 내용을 담은 책을 서재에서 꺼내 아이에게 다시 소리내어 읽어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 이 눈부신 신록의 계절에 내가 제일 먼저 아이에게 읽어주고 싶은 책은 '바다로 간 화가'(모니카 페트 글, 안토니 보라틴스키 그림)이다. 한창 책을 읽어주던 무렵, 나와 딸이 좋아했던 책으로 '행복한 청소부'가 있었다. 노동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교양과 지식의 진정한 쓰임새가 어디에 있는지를 이처럼 황홀하게 말한 책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이 나왔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야 알았는데, 각별히 그림그리기를 좋아하는 딸 아이에게 '바다로 간 화가'의 문학적 향기를 전해주고 싶은 것이다. 다음으로는 신간인 '히로시마'(나스 마사모토 글, 니시무라 시게오 그림)다. 이 그림책은 히로시마 원폭피해의 실상을 알리고 있는데,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낮지만 진지한 목소리로 전해주고 있다. 물론 이 책을 읽어주고 나서는 지은이가 빼먹은 듯한 사실을 잘 말해줄 예정이다. 결코 되풀이 돼서는 안될 비극에 대해서는 작가의 생각에 동의하지만 그 비극이 일어난 원인은 바로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심에 있음을 설명해 주겠다는 뜻이다. 한권 더 꼽으라면 '나무도감'(도토리 기획, 이제호 외 그림)을 들겠다. '도감을 함께 읽어?' 라며 의아해 할지도 모르나 책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정성스런 세밀화와 아이들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배려한 설명글이 이 책의 장점. 아이가 보기 전에 내가 즐겨 읽던 책인데 어느새 서가의 맨구석 자리로 밀려나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책으로 떠나는 숲 여행인 만큼 아이도 즐거워 할 터다. 아무래도 이번 '거사'를 위해서는 '당근'을 준비해야 할 성 싶다. 설사 마음에 드는 책이 아니더라도 아이가 평소 사고 싶었던 책을 선물로 마련해 주겠노라 하고, 다시 책을 소리내어 읽어보자고 유혹해야겠다. 이쯤되면 아이를 위해서 책을 읽는 것인지 나를 위해서 읽는 것인지 헷갈리고 만다. 그나저나 나는 아이와 함께 소리내 책 읽을 상상만으로도 벌써 설레고 있다. 이권우 < 도서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