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혁신 시대를 열자] 제1부ㆍ끝 : (5) 'VI 여건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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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세계적인 윤활유 전문업체인 캐스트롤은 1990년대 말 금속절삭용 냉각제 판매를 위한 획기적인 전문가 시스템을 개발했다.
재료, 온도, 용도에 따른 각종 데이터를 입력해 놓고 인공지능을 사용해 실제 상황처럼 시뮬레이션이 가능하도록 만든 이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면 영업사원들은 노트북 컴퓨터 하나만 갖고도 영업을 할 수 있었다.
카탈로그에 있는 윤활유 샘플을 들고 다닐 필요도 없었고 실험결과를 기다리느라 며칠씩 허비할 이유도 없었다.
이전에는 윤활유 종류를 잘못 적용해 공정실패율이 50%에 달했지만 새 전문가 시스템을 쓰면 이 비율이 10%로 떨어진다는 적용 결과도 나왔다.
고객사나 영업사원이나 모두 혜택을 볼 수 있는 새 시스템이 개발됐다며 회사측은 흥분했다.
그러나 캐스트롤은 이 시스템을 도입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예상과 달리 고객사들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문제는 회사 내부에 있었다.
새 시스템의 장점을 홍보해야 할 영업사원들이 오히려 시스템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고 다녔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경영자들이 시스템 도입 결정을 내리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공정한 절차(fair process)'를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영업사원들은 자신들을 논의에 참여시키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린 경영자들의 의도를 의심했다.
앞으로 무슨 변화가 일어날지에 대해서 이렇다할 말이 없자 영업사원들은 자신들의 일을 없애려는 시도라고 지레 짐작하고 불안에 떨었다.
혜택을 입게 될 영업사원들이 반대하고 나서면서 시스템 도입은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캐스트롤의 실패 사례는 회사가 '가치롭다'고 생각하는 것과 종업원들이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큰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회사는 결과적으로 종업원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면 그 과정은 문제될게 없다고 생각하는 반면 종업원들은 결과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 결정 과정에 자신이 참여하는 것을 더 소중히 여긴다.
사원들은 '공정한 결과'보다 '공정한 절차'를 더 중시한다는 얘기다.
공정한 절차가 더 중요하다는 것은 사실 당연한 것 같지만 새로운 시각이다.
인센티브, 스톡옵션, 성과급 등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에 뿌리내려 가고 있는 새로운 인적자원 관리 시스템이 기껏해야 공정한 결과에 바탕한 것임을 생각하면 특히 그렇다.
가치혁신론의 주창자인 김위찬 교수와 르네 마보안 교수는 공정한 절차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가치혁신 전략을 실행시키기 위한 인적자원 및 조직관리론으로 체계화했다.
직원 존중에 바탕을 둔 공정한 절차의 확립이 가치혁신 능력을 향상시킨다는게 골자다.
두 교수는 지난 90년대 중반 19개 다국적기업의 전략적 의사결정 과정을 연구하면서 이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의사결정에 있어 절차의 공정성만 지켜진다면 심지어 직원들은 자신들이 손해를 보더라도 회사를 신뢰하고 돕는다는 사실까지 확인했다.
캐스트롤의 예를 보자.
회사측은 전문가시스템 도입으로 직원들에게 커다란 혜택을 주겠다는 의도였지만 의사결정 과정에서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못해 격심한 반대에 부딪히고 말았다.
김 교수와 마보안 교수가 논문 '공정한 절차:지식기반 경제에서의 경영'(하버드비즈니스리뷰 1997년 7ㆍ8월호)에서 소개한 미국의 산업장비업체 도버(Dover)사도 꼭같은 경우였다.
이 회사는 지난 1990년대 초반 엘리베이터공장에 새로운 생산운영 방식 도입을 결정하면서 홍역을 치렀다.
새 방식은 직원들에게 엄청난 이익을 주는 것이었지만 충분한 설명 없이 도입이 이뤄지면서 구조조정이 있을 것이라는 루머만 퍼지게 했다.
종업원들이 불안해하면서 생산성은 떨어지고 파업위기에까지 몰렸다.
경영진이 직원들을 20명씩 초대해 그간의 잘못을 시인하고 앞으로의 변화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뒤에야 새 생산방식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공정한 절차는 '인적자산' '노동력'이 아닌 인격체로서 대우받길 원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에서 출발한다.
공정한 절차의 세 가지 원칙인 △참여 △설명 △기대수준의 명료화 등도 여기서 비롯된다.
직원들은 자신의 아이디어가 신중하게 받아들여지길 바라며 특정한 결정상황에 대해 왜 그러한 결정이 내려졌는지 이해하길 원한다.
결정과정에서 생겨난 신호나 징후에 대해서도 민감하다.
회사측은 직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의사결정에 그들을 동참하게 함으로써 존중한다는 의미를 전달할 수 있으며 최종결정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회사 전체 이익을 위해 공평하게 의사결정을 했다는 확신을 주게 된다.
공정한 절차는 그러나 합의에 의한 결정이 아니라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원만한 분위기를 만들거나 타협점을 모색하는 수단으로 이를 시작해선 안된다.
공정한 절차에 의해 모든 아이디어에 기회가 부여되는 한 의사결정은 합의가 아닌 장단점 분석을 토대로 이뤄져야 한다.
공정한 절차가 효과적이라면 왜 이것을 실행하는 회사가 거의 없을까.
경영진들이 공정한 결과를 공정한 절차와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원들에게 적당한 지위와 권한을 주고 버는 만큼 보상을 주는 것은 공정한 결과이지 공정한 절차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정보를 힘과 권위의 원천으로 간주하는 경영자들이 공정한 절차를 위협으로 인식하는 것도 문제다.
이같은 생각을 가진 경영자들은 직원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멀리하고 메모나 서식을 통해 의사교환을 대체하곤 한다.
가치혁신은 그 규모에 따라 때로는 회사 전체를 완전히 새로 바꾸는 작업이 필요하다.
때론 엄청난 반대에 부딪힐 수도 있다는 얘기다.
사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며 그 구체적인 도구가 공정한 절차다.
'공정한 절차' 개념은 세계 경영학계에선 인적자원 관리에 새로운 지평을 연 놀라운 전환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실제로 두 교수의 이 논문은 지난해 1월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 의해 인적자원 관련 논문 '역대 베스트 5'로 선정됐다.
송대섭 기자 dss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