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콜롬비아 지배계층 10%의 적이 되고 싶었다." 콜롬비아 최대 반군단체 무장혁명군(FARC) 최고위 지도자 가운데 한 명으로 최근 검거된 시몬 트리니다드(53)가 약 20년전 하루 아침에 `리카르도 팔메라 피네다'란 자신의 본명을 버리고 반군에 합류한 사연을 밝히면서 한 말이다. 트리니다드는 FARC의 핵심인 서기국 지도자 7명 가운데 한 명으로 콜롬비아 당국이 거액의 현상금을 걸어놓고 있고 인터폴이 수배할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다. 지난해 8월 취임 이후 강경한 반군토벌 정책을 추진하는 알바로 우리베 대통령이 그 동안 검거한 FARC 소속원 중 최고위 `거물급'인 트리니다드 체포 소식에 이례적으로 격찬을 표하고 `반군 패퇴'의 징조라고 평가할 정도다. 그러나 지역 명망가인 변호사 아버지를 둔 유복한 가정 출신으로 30대 중반의잘 나가던 은행원이었던 그가 사랑하는 아내와 두 자식을 버리고 험악한 밀림의 반군기지로 떠난 이유를 들어보면 지난 40년간 무장투쟁을 이어오고 있는 좌익 게릴라들의 일면을 읽을 수 있다. 그는 반군내 최고위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에다 각종 납치사건을 주도하며 자금조달책으로 한창 활동하던 1999년에 한 회견에서 편안한 삶을 버린 이유에 대해 "콜롬비아 땅의 90%를 독점하는 지주 계층 10%에 대항해 싸우는 진보적 인사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였다"면서 "이후 나도 (그 10%의) 적이 되었다"고 말했다. 지난 2일 에콰도르 당국에 체포되면서 반군과 함께 한 두번째 삶도 종지부를 찍은 그는 현재 수도 보고타의 교도소에서 수십 건의 집단학살, 납치, 테러 혐의로 최고 60년의 징역형을 앞둔 운명을 맞게 됐다. 한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지는 트리니다드의 삶 그 자체에 콜롬비아 40년 내전 사태의 불행이 그대로 투영돼있다. 현재 콜롬비아에서는 반군과 정부군간 전투로 해마다 3천여명이 희생되는 사태가 수십년간 계속되고 있고, 또한 내란과 함께 시시각각자행되는 납치 사건에 환멸을 느껴 해외이주한 콜롬비아 국민도 자그마치 200만명에이른다. 트리니다드는 콜롬비아 북부 방대한 카리브해 연안의 열대지역 특성이 두드러지는 바예두파르 시(市) 부유한 목장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 지역 부유 계층을 대표하는 명망있는 변호사였다. 보고타 명문 사립고를 졸업한 트리니다드는 호르헤 타데오 로사노 대학에서 경제학 학위를 받고는 고향으로 돌아가 은행원이 되었다. 콜롬비아 주간지 세마나에 따르면 그의 아내도 같은 금융계통에서 일한 엘리트였다. 컨트리 클럽 회원으로 유복한 생활을 한 이들은 자녀들도 지역의 가장 좋은학교에 보내는 등 경제적으로 여유가 넘쳤다. 트리니다드 아버지를 세사르 주정부 고문 변호사로 고용한 에르난도 몰리나 주지사는 "땅과 가축, 훌륭한 교육 등 모든 것을 손에 넣었는 데 한순간에 그 같은 결정을 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몰랐다"고 말할 정도다. 행복했던 트리니다드의 첫번째 삶은 반군 합류로 끝나고 `반군 투사'로서 삶이이어진다. 그는 대부분이 가난한 농민 출신인 반군 조직에서 부유한 출신 성분을 십분 활용해 신망있는 지도자로 급부상한다. 밀림으로 떠나면서 은행의 주요 문서기록과 자신이 취급했던 카리브해 지역 부유한 가정의 유용한 정보를 이용해 막대한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의 고향에서 주요한 납치와 살인 사건을 주도했다. 연방검찰에 따르면그는 콘수엘로 아라우호 전 문화장관의 납치 및 2001년 살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다. 아라우호 전 장관은 트리니다드와는 사돈이 되는 사이다. 반군 공격으로 119명의 주민이 집단학살된 2002년 보하야 마을 습격 사건도 지휘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 과정에서 트리니다드의 가족도 피해를 겪었다. 반군에 맞서는 우익 민병대는그의 누이를 납치했으며, 다른 가족들도 민병대의 위협을 받고 고향을 떠날 수밖에없었다. 아라우호 전 장관의 아들인 몰리나 주지사는 "이전에는 그렇게도 평화스러운 지역이었는데, 이 같이 엄청난 고통과 슬픔이 우리 앞길에 펼쳐지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고 트리니다드 체포에 임한 자신의 감정을 전했다. (멕시코시티=연합뉴스) 김영섭 특파원 kimy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