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의 활동에 대한 자성적 성찰 가족들과 함께 37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고국땅을 밟은 벅찬 기쁨은 한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양심적인 학자'에서부터 `거물간첩'으로까지 추락하는 저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남북의 화해를 향한 디딤돌이 되어 보려했던 노력이 오늘의 상황 속에서 참으로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북을 동시에 사랑하고, 동시에 비판하려는 저의 삶과 철학에도 불구하고 그렇 지 않게 비친 저의 행동에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있는 데 대해 심각히 자성한다. 양심을 걸고 다음과 같이 밝힌다. 1. 1973년 처음 북을 방문했다. 그때 남한에는 유신체제가 선포되어 매우 암울 한 상황이었지만, 독일과 서구의 학계에서 당시 북은 지속발전 가능성을 보여주는 나라로서 평가받고 있었고, 제 평가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조국의 하나인 북을 직 접 보고 학문적 탐구를 위해 북을 방문했고, 이런 관심은 계속적인 연구를 통해 70 년대 말 완성된 저의 교수 자격 논문인 `소련과 중국의 사회주의 비교연구'로 결실 을 맺었다. 2. 노동당원으로 의식하고 활동해온 바 없다. 첫 북한 방문때 받았다는 `주체사상교육'과 `노동당 입당'은 70년대 북한을 방 문한 방문자들이 거치는 불가피한 통과의례였다. 그 당시 행한 행동들은 30년이 지 난 지금 거의 뇌리에 남아있지 않을 만큼 저의 삶에서 아무런 의미로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이렇게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리라는 생각도 없이 국정원에서 자발적으로 언 급하게 된 것이다 3.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통고받거나 활동한 바 없다. 일부에서는 저를 북한 권력서열 23위의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엄청난 북한 실세 로서 주체적 활동을 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저는 후보위원을 수락하거나 활동 한바도 없고, 북이 저에게 후보위원으로 활동할 것으로 요구한 적도 없다. 1994년 7월 김주석 사망시 장례식에 꼭 참석해 달라는 연락을 구두로 받았다.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도 행사장 명패에는 송두율이라는 이름이었으며, 그 뒤 김철수 가 노동당 서열 23위 후보위원이라는 기사를 본 적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통보받거나 수락한 적 없다. 그 후 학술대회 준비 차 방북해 몸이 아파 북에 약을 신청했을 때 한 약봉지는 김철수로, 또 다른 약봉지 는 송두율의 이름으로 되어 있어 내가 왜 김철수냐고 북에 항의했다. 통고받은 바도 없이 그냥 사후 인지만 하고 있었던 상황, 북에서 나에게 정치국 원으로 일방적으로 모자를 씌웠던 상황, 아무런 권한을 행사해 보지않은 조건에서 `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라는 명칭에 저는 의미를 둘 수 도 없고, 동의할 수도 없 다. 더구나 1994년 7월에는 이미 독일국적 취득자였다. 4, 거액의 `공작금'을 북으로 받았다는 보도와 관련해 저는 92년부터 94년간 3년간 매년 2만-3만불 정도, 총 6만-7만불 그리고 73년, 79년, 84년, 88년, 91년까지 7-8차례의 왕복 교통항공비 2만불 정도 해서 도합 7만-8만불을 받았다. 92~94년 받은 6만-7만불은 공작금이나 개인적 활동비로 사용된 것이 아니고 80 년대 중반까지 독일 오펜바하 시에 있었던 `한국학술연구원'을 되살리기 위한 경비 로 사용됐다. 이를 위해 운영자금이 필요했던 차에 제가 북측에 제의해서 지원받았 다. 그러나 홈볼트 대학에 초빙교수로 임명된 1994년 여름 학기부터는 시간에 쫓겨 이 계획을 포기하고 모든 자료를 독일 에센 시에 있는 재단법인 `아시아 재단'의 한 국연구소에 기증했다. 5.`충성서약문'을 쓴 적이 없다. 북은 공화국창건일 등 특별한 날에 `축하문'을 많은 해외 인사들에게 요구한다. 남한사회에서 축전이나 조의문을 보내듯, 1년에 한 두차례 극히 형식적인 내용을 담아 보낸 축전이었다. 6.이번 조사과정에서 이루어진 오길남씨와의 대질신문도 사실과 다르게 보도됐 다. 오씨의 처음 입북에서 그의 입북을 권유하지 않았고, 그의 탈북후 재입북을 강 요 또는 협박한 적도 없다. 오씨와의 대질신문은 녹취되어 있으니 이를 들으면 진실 이 드러날 것이다. 이 순간까지 어느 누구 한명에게도 입북을 권유한 적 없다. 7.1995년 해마다 5차에 걸쳐 북경, 그리고 금년 봄에 평양에서 열린 6차`남북해 외통일학술회의'가 북의 공작에 의해 성사된 것처럼 보도되고 있지만, 이 행사는 처 음부터 남쪽의 연구단체가 제안하고, 본인이 중간에서 북에 제안해 북쪽의 `사회정 치학회'가 받아들여 남북학자가 사전 협의를 거쳐 만든 것이다. 이 학술행사를 위해 가교 역할을 했다. 화해자로 살고자 하는 저의 신념과 지향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치우친 점이 있었 다고 인정한다. 예컨대 노동당 입당 같은 문제들에 대해 저에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 아준 많은 분들, 민주화 운동에 애쓴 분들 , 그리고 국민들께 깊이 사죄한다. 여러 의혹이 난무하는 속에서 그리고 처벌받을 수도 있는 상태에서 민주화와 경 제발전을 이룬 남한 사회로의 귀국을 가족과 함께 선택한 진의를 살펴주시길 바란다. 사죄할 것은 사죄하고 해명할 것은 해명하고, 실정법적인 처벌을 받을 사항이 있으면 감당함으로써 한국사회의 이방인이 아니라 우리 민족에의 참여자가 되어 남 북 모두를 끌어안는 화해자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겠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