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거래소 상장업체인 P사의 L사장은 한때 상장폐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주가가 조금만 떨어져도 소액주주들의 항의가 빗발쳐 회사업무가 마비될 지경에 처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는게 L사장의 한탄이다. 심지어 신규투자를 하려고 하면 "차라리 그 돈으로 배당금을 늘려라"는 간섭까지 받기 일쑤라는 것이다. P사는 매출규모는 크지 않지만 부채비율이나 영업이익률,주식분산 등에선 우량기업으로 꼽히는 업체다. 그래서 L사장은 "요즘같아선 은행금리가 싸져 자금조달에도 별 문제가 없어 뭐하러 굳이 어렵게 상장을 했는지 후회가 될 정도"라고 털어놨다. 그동안 증시 상장(등록)은 기업 경영자들의 '꿈'이었다. 경영자들은 상장이 기업의 미래를 탄탄하게 다지는 기반이라고 믿어 왔고 그런 점에서 상장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오히려 '상장이 해가 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경영 투명성에 대한 과도한 요구와 기업공개 후 늘어나는 업무부담이 오히려 기업경영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에서다. ◆기업공개 후 득(得)보다 실(失)이 많다 실제로 장외 우량업체들은 기업공개를 꺼리고 있다. 상장으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는 판단때문이다. 무엇보다 기업공개의 최대 목적중 하나인 자금 직접조달은 저금리 현상이 장기화되면서 큰 유인책이 못되고 있다. 메리츠증권 노기선 부장은 "요즘 코스닥 시장에 등록될 만한 기업이면 은행에서 먼저 찾아가 돈을 써달라고 부탁할 정도"라고 말했다. ◆자진 상장폐지도 잇따라 아예 상장을 취소하겠다는 기업도 나오고 있다. 상장사인 극동건설은 최근 자진 상장폐지를 결의했다. 회사측은 "주식 분산요건을 갖추지 못한데다 영업활동에 주력하기 위해서"라고 이유를 밝혔다. 증권업계에선 극동건설 상장폐지가 경영권을 인수한 외국계 기업 KC홀딩스의 결정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극동건설 관계자는 "KC홀딩스 입장으로선 상장폐지 후 공시의무 등이 없어져 각종 부동산 사업들을 감시받지 않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국내 증시에서 자진 상장폐지한 사례는 모두 5건이다. 대부분 외국계 기업으로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상장을 유지하는 필요성을 못느낀 데 따른 것이다. 지난 2001년말 상장폐지한 송원칼라 관계자는 "국내에 진출한 외국기업들은 국내의 낙후된 경영환경에 부담을 갖고 있다"며 "증시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대가가 너무 커 오히려 경영자원을 낭비할 수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상장기피는 심각 모피업체인 I업체 K사장은 최근 기업을 공개하려는 생각을 접었다. 6백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I사 실적이면 코스닥 등록이 무난하다는 주위의 권유가 끊이지 않았지만 "솔직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다"고 K사장은 털어놨다. 실제 월평균 코스닥 등록심사 청구기업은 지난해 22개사에서 올 들어 7개사로 뚝 떨어졌다. 증권사 IPO 관계자들은 "작년까지만 해도 코스닥 등록을 단기 경영목표로 삼았던 중소기업들이 올 들어 태도가 달라져 코스닥 시장에 올라가봤자 큰 득이 없다고 생각하는 곳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주가조작 등 비리가 잇따르면서 기업공개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진데다 특히 정보기술(IT)쪽이 아닌 '굴뚝'기업들은 코스닥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를 당하고 있어 기업공개 기피가 심각하다고 이들은 설명했다. 김철수·정종태 기자 kcs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