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장을 보러 나가면 대형 할인점의 두부 판매대에서 늘 아내와 다툼을 하게 된다. 유통기한 밑에 적혀있는 원산지 표기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진열된 두부를 어지러뜨리기 일쑤인 아내의 행동이 눈에 거슬리기 때문이다. 이 친구가 찾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콩 1백%"라는 표기이다. 국산 콩이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부담스럽다. 어스름 저녁 무렵이면 심부름으로 사 오던 신문지에 둘둘 말린 한 모의 두부가 기억의 전부인 나로서는 마음이 편하지 않다. 어느새 유전자변형 콩을 논할 만큼 환경이 피폐해져 있어 먹거리에 대한 선택 기준들이 깐깐해지는 우리네 자화상에 쓴웃음을 짓게 된다. 신문의 기사며 사진들이 박인 두부도 안심하며 온갖 솜씨를 발휘해 상에 내주시던 그 시절 어머님의 손맛이 그리워지는 요즈음이다. 두부를 이용해 맛깔 나는 음식들을 차려내는 세 집을 소개한다. ◆디딤돌숨두부(미사리 팔당대교 5백m전,031-791-0062)=미사리 조정경기장을 지나 팔당대교에 이르는 도로 변에는 카페들이 즐비하다. 이곳 저곳 기웃거리다보면 기분 좋은 식당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질 좋은 우리 콩만을 뚝심 있고 고집스럽게 지켜가고 있는 '두부 전도사'가 버티고 있는 디딤돌숨두부.부모님께 배운 황해도식 '숨두부'는 투박하고 거칠지만 진지한 맛을 선보인다. 물과 기후 덕에 양질의 농산물이 재배되는 강원도 땅의 콩을 가져다가 옛날 방식을 고수하며 가마솥에서 끓여낸다. 이 집의 간판메뉴인 디딤돌 정식은 천연간수로 응고시킨 숨두부(순두부의 황해도 사투리)로 시작한다. 넓적한 냄비에 그득 담아 내오는 숨두부는 양념장을 두르지 않은 채 먹어도 좋을 만큼 신선하고 고소하다. 크림스프처럼 녹아 내리는 숨두부로 입맛을 돋우고 나면 비지찌개와 두부지짐이 뒤를 잇는다. 콩 물을 내리고 남은 비지는 생쌀을 갈아 쑨 죽처럼 입자가 곱고 부드럽다. 서너 수저 밥에 둘러 비비면 절로 쩝쩝 소리가 나고 작은 뚝배기가 아쉬울 따름이다. '모두부'를 자른 후 계란 옷을 입혀 기름에 지져주는 두부부침은 단내가 풍기는 숨두부보다 고소함이 강하다. ◆화심정(서울 강남구 역삼동 특허청길,02-585-9008)='화심'이라는 지명이 암시를 하듯 이 집은 순두부를 주력으로 하는 두부 전문점이다. 전라북도 '완주 8미'중 하나로 꼽히는 '화심순두부'는 쇠고기,파,바지락을 기본으로 해서 얼큰하게 한 뚝배기 끓여 내는 게 특징이다. 두부를 만들어 내는 방식은 화심 스타일과 닮아 있지만 맛내기는 주인이 직접 연구 개발해 독특한 인상을 풍긴다. 순두부는 순한 맛과 얼큰한 맛으로 나뉘는데 주변의 직장인들은 압도적으로 얼큰한 맛을 찾는다. 해장을 하려는 속셈이겠지만 속풀이에 잘 듣는 것은 순한 맛 쪽이다. 순두부로 해장을 한다면 갸우뚱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조개와 소라를 넣어 우려낸 시원한 국물에 곱게 쑨 순두부와 콩나물은 의외로 궁합이 좋다. 같이 내오는 양념구이 김 가루를 얹어 휘휘 둘러 먹으면 김의 고소함마저 순두부에 고스란히 녹아 내린다. 얼큰한 맛의 순두부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혀에 자극이 전해질 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얼큰함이 순두부 속을 파고든다. 장시간 졸여야 속까지 간이 배는 두부의 특성상 한 수저 입에 물면 처음에는 얼큰하지만 이내 두부 속의 순한 맛이 입안을 중화시킨다. 소주라도 한잔할라치면 두부두루치기가 어울린다. 큼직하게 썬 '모두부'에 갖은 야채들과 고추장 양념으로 맛을 낸 두부는 혀에 닿는 촉감이 유별나다. ◆명동할머니국수(서울 을지로쪽 명동입구 외환은행 뒤,02-778-2705)='SINCE 1958'.가장 소박한 한끼 식사인 멸치국수로 45년을 명동에서 버틴 저력이 무엇인지는 식사시간에 자리를 지켜보면 알 수 있다. 20여 가지가 넘는 메뉴들을 척척 소화해 내는데 손님들의 90%는 단골이고 나머지는 일본인 관광객들이다. 이들이 찾는 메뉴는 딱 한가지 '두부국수'.두부로 국수의 면발을 만들었나 하는 의문이 가지만 국수를 한 사발 받고 나면 궁금증이 풀린다. 일반적인 잔치국수에 두부를 듬성듬성 썰어 넣은 모습이 상당히 낯선데,손님들에게 국수만 말아주기가 미안해 직접 만든 두부를 얹어주기 시작한 창업주 할머니의 아이디어가 몇십 년째 명동을 드나드는 손님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잘 우려낸 멸치국물에 소면을 말고 두부와 김,그리고 양념장을 올리면 끝이 나는 두부국수지만 맛은 각별하다. 멸치육수와 두부가 이렇게 잘 어울리나 의아할 만큼 담백하고 고소하다. 두부의 양이 많아 아무리 건져 먹어도 모자라지 않다. 양념장을 처음부터 풀면 멸치 육수의 참 맛을 느끼기 힘들다. 반쯤 먹고 나서 풀어도 늦지 않으니 두 가지 스타일로 먹는 것을 권한다. 국수를 한 그릇 다 비우고 일어서면 은근한 두부의 향이 가게 밖까지 따라 나선다. 김유진·맛 칼럼니스트 showboo@dreamw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