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변양균 기획예산처 차관의 집무실을 찾았다. 눈코뜰새 없는 일정속에 잠깐 여유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차관에 임명된지 한달이 다 돼가는데 자리는 좀 잡으셨느냐는 질문부터 던졌다. 변 차관은 "정신 없습니다. 회의로 시작해 회의로 끝납니다"라고 답하면서 "예산처 차관이 참석해야 하는 공식회의가 몇 개인지 아십니까"라고 되물었다. 49개라고 했다. 장관을 대신해 각 부처 업무보고에도 참석해야 하고 비공식회의와 내부회의까지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대화 도중 변 차관과 행시 동기(14회)인 김광림 재정경제부 차관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회의 참석차 예산처에 왔다가 잠시 들른 것이다. 김 차관은 앉자마자 혼잣말처럼 한마디했다. "이거 완전히 회의 공화국이야." 김 차관은 본인이 참석해야 하는 회의가 몇 개인지 세어보지 않았다고 한다. "대략 40개 가까이 된다고 누군가 얘기했지만 시시때때로 열리는 경제차관회의 등을 포함하면 몇 개인지는 별 의미가 없다"는 설명이다. 다시 변 차관의 고충 토로(?)가 이어졌다. "회의 참석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요즘은 토론이 필수입니다." 예산을 책임지는 부처 차관으로서 토론 준비도 만만치 않다는 얘기다. 김 차관도 거들었다. "차관회의 풍경도 많이 변했어. 예전에는 다른 부처 얘기가 나오면 아무 말 안했는데 요즘은 너나 할 것 없이 거침없이 의견을 내놓으니 말이야." 이들은 가장 활발하게 의견을 내놓는 인물로 A부처 C차관을 꼽았다. 장.차관들은 예전과 달리 '훈수'를 두는 다른 부처 장.차관들까지 설득해야 하는 짐을 지게 된 것이다. 김 차관이 회의 참석을 위해 자리를 뜬 뒤 변 차관에게 회의와 토론이 너무 많은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져봤다. 변 차관은 정색을 하고 답했다. "과거와는 다르죠. 이번 정부에서 하는 회의와 토론은 결론을 보기 위한 겁니다." 예전에는 대부분 회의가 형식적인 절차에 그쳤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 부처간 이견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더 이상 시간을 빼앗는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 "토론 준비 잘 하십시오"라는 말을 던지고 집무실을 나왔다. 차관실 앞에는 결재를 기다리는 직원들이 줄을 서 있었다. 이는 재경부와 예산처 차관의 일만은 아니다. 요즘 정부부처 공무원 대부분은 회의와 토론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많은 공무원들은 아직도 이런 토론과 회의문화를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다. 다른 부처의 B국장은 "장·차관은 대통령을 직접 만나 토론하니까 그 의미를 알지 모르겠지만 회의준비에 지쳐가는 실무진들도 있다"고 푸념했다. '노무현식 토론문화'가 공직사회 전반에서 소화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