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3월 막상 창업을 하긴 했지만 회사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말이 회사지 여전히 아마추어 동호회 티를 벗어나지 못했죠." 권석철 사장은 창업 당시의 하우리에 대해 이같이 회고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서울 양재동의 반지하방에 차린 사무실은 5평도 안됐고 직원은 4명의 개발자와 관리직 사원 1명이 전부였다. 창업 멤버들이 대부분 지방 출신이라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일도 일상사였다. 유일한 관리직 사원이었던 김은미씨(현 경영지원실장)는 직접 밥과 반찬을 만들어 직원들의 끼니 걱정을 덜어줘야만 했다. 시장 여건 역시 좋지 않았다. 당시 백신 분야에는 안철수연구소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던데다 해외 업체들도 저가 전략을 구사하며 국내 시장을 대대적으로 공략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이름조차 모르는 신생 벤처기업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권 사장은 우선 시장에 내놓고 팔 제품을 만드는 게 급선무라 판단했다. 제품이 있어야 하우리라는 브랜드도 소비자들에게 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권 사장을 포함한 개발자들은 기술을 제품화하는 작업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특히 백신 소프트웨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바이러스 진단 엔진을 만드는 데 개발자들은 모든 힘을 쏟았다. 하지만 이전에 개발했던 아마추어 수준의 백신을 상용 제품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진단할 수 있는 바이러스 숫자를 외국 제품과 맞먹는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부터가 만만치 않았다. 하루에 한 사람당 평균 40∼50개의 치료 모듈을 데이터베이스화하는 고통스러운 작업이 몇 개월간 지속됐다. 바이러스 하나마다 일일이 증상과 치료 방법 등을 분석해야 했기 때문에 이 일은 더욱 힘들고 또 지루한 작업이었다. 이른 봄에 시작한 작업은 여름이 막바지에 다다라서야 겨우 끝을 맺었다. 하우리는 도스 운영체제에서 구동되는 백신을 개발,무료로 통신망에 올렸다.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바이로봇'의 탄생이었다. 권 사장과 창업 멤버들은 처음으로 이 제품을 완성했던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도스용 프로그램이긴 했지만 당시 느꼈던 흥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이젠 뭔가 할 수 있겠구나 싶었죠." 이후 개발작업은 빠르게 진척됐다. 98년말에는 윈도용 백신 개발에도 성공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기업용 상용 제품을 출시,본격적으로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물론 실제로 사업적 결실을 얻기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일부 파워 유저와 기업 실무자들에 의해 하우리라는 이름이 조금씩 입에서 입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실제 구매로는 거의 이어지지 않았다. 타 백신업체들도 여전히 하우리를 경쟁상대로조차 여기지 않았다. '아마추어' 이미지를 벗어나는 게 관건이었다. 장원락 기자 wr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