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2월말, A카드사 종무식 현장. CEO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단상위에 올라선다. 이 때 흘러나오는 웅장한 배경음악. 그룹 퀸의 '위아더 챔피언'(We are the champions). CEO가 "우리 회사가 경쟁사를 (시장점유율에서) 눌렀다"는 승전보를 알리자 직원들은 환호성을 내지른다. 하지만 그 때만 해도 직원들은 알지 못했다. '챔피언' 타이틀이 어떤 대가를 요구할지. ◆ '화(禍)' 부른 무한경쟁 비즈니스의 기본 속성은 '경쟁'이다. 기업들은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성장한다. 하지만 최근 2~3년간 카드사들은 경쟁이 아닌 '전쟁'을 치렀다. 경쟁의 정도가 '도'를 넘어섰다는 얘기다. 카드사들이 한창 잘나가던 2001년 봄. 명동시내 한복판에 청소년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신규회원 유치를 위해 모 카드사가 좌판영업을 시작한 것이다. 카드모집인은 신규 가입 회원들에게 줄 경품을 내놓는다. 살아있는 토끼다. 카드를 발급받으면 애완용 토끼를 공짜로 준다는 말에 학생들은 너도나도 신규발급 신청서를 써내려간다. 바로 옆, 다른 카드사의 좌판에서는 현금 2만원이 가입 선물로 주어진다. 업계에서 말하는 속칭 '막발(마구잡이식 발급)'이 벌어지는 풍경이다. 최근 2∼3년간 카드사들은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 결과 신규회원 한명을 모집하는데 드는 비용(모집인 수당+경품비)은 2000년 초 약 2만원에서 지난해에는 약 5만원까지 치솟았다. 지난해 새롭게 발급된 카드수가 약 1천5백만장임을 감안하면 카드사들은 총 7천5백억원의 모집비용을 쓴 셈이다. 시장점유율을 높일수 있다면 카드사들은 역마진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백화점에서 카드로 결제하면 10% 할인은 기본이었다. 6개월 무이자할부,주유시 리터당 40원 할인 등 '밑지는' 서비스도 잇따랐다. 이같은 카드사들의 '막발' 때문에 금융소비자들의 지갑은 한장 두장 늘어나는 신용카드로 점차 두꺼워져 갔다. 경제활동인구 1인당 카드소지수는 99년 1.8장에서 지난해에는 4.6장으로 3배 가까이 증가했다. 그리고 이렇게 중복발급된 신용카드중 상당수는 카드대금 '돌려막기'에 이용됐다. 카드사들이 이처럼 무모한 경쟁을 벌이게 된데에는 카드사들간의 지나친 '보안의식'도 요인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카드사들은 대환현금서비스 규모, 회원 분포현황, 카드한도 등에 관한 숫자를 일절 외부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카드시장의 흐름을 제때에 파악하지 못해 영업의 강도를 조절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B카드사의 전략기획담당 임원은 "카드업계에는 시장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합리적인 영업전략을 짤수 있는 통계가 전무하다"며 "카드사간 정보의 동맥경화 현상이 과당경쟁을 부추긴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 사태 악화시킨 정부규제 카드사들간의 과다한 경쟁은 결국 정부의 직접규제를 초래했다. 카드사들은 신용판매에서 줄어든 수익을 메우기 위해 현금서비스 한도를 앞다퉈 늘렸다. 이 전략은 '현금서비스 인플레'로 연결됐다. 현금서비스가 전체 카드사용액의 70%에 이를 정도로 불어나자 금감원은 '50 대 50룰'이란 칼을 빼들었다. 대출서비스(현금서비스+카드론)와 신용판매(일시불+할부)의 자산비중을 동일하게 맞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충당금 적립기준까지 강화되자 카드사들은 회원에 대한 현금서비스 한도를 급격히 축소했다. 하지만 이같은 정부의 규제와 카드사들의 대응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악화시키는 측면이 더 강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급작스런 이용한도 축소로 비교적 신용이 양호한 회원들까지도 카드대금을 제때 결제하지 못하는 사태가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회원들은 한번 연체기록이 생기면 카드한도가 더욱 줄어들어 점점 더 어려운 상황에 빠지고 결국은 신용불량의 낙인이 찍히게 된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모 카드사 임원은 "일시에 이용한도를 축소하기보다는 회원 개개인의 신용 상황을 점검해 대환대출로 전환하는 등 여유를 두고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최철규 기자 gra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