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프로펠러가,프로펠러가..." 1975년 1월초 베트남 상공. 요란스럽게 귀청을 때리던 비행기 프로펠러 소음이 잦아드는가 싶더니 순간 비행기 동체가 균형을 잃고 기우뚱거렸다. 옆좌석 동행인이 창밖을 가리키며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프로펠러 1기가 멈춘 게 아닌가. 정신이 아뜩해졌다. 창문 아래 멀리 보이던 울창한 녹색 야자숲이 동체를 향해 마구 치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앞좌석 등받이를 잡은 손은 땀으로 흥건히 젖었고 입안은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눈을 감았다. 가족들의 얼굴이 비행기 속도 만큼이나 빠르게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SOS를 외치는 조종사의 다급한 목소리는 벌써 저세상 소리였다. "정말 죽는구나,캄란베이에서 부장과 함께 귀국할 걸...,여행보험도 가입하지 않았는데..." 무역부 차장으로 고철수입차 베트남 출장을 갔던 때였다. 고철을 녹여 철근 등을 생산하는 회사에 전쟁터인 베트남은 가장 중요한 고철 수입처 가운데 하나였다. 부장과 캄란베이에서 고철 3천t을 실어보낸 뒤 고철을 더 구해보자는 욕심에 민항기 대신 미군 수송기를 개조한 4발 프로펠러기를 타고 중부 퀴농으로 가는 도중에 일이 벌어졌다. 다행히 조종사의 SOS 무전이 먹혀들고 나머지 3기의 프로펠러가 제기능을 잃지 않은 덕분에 가까스로 주변 탈라트시에 불시착할 수 있었지만 "베트남 귀신"이 될뻔 했던 아찔한 순간이다. 부실하기 짝이 없는 그 비행기를 다시 타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육로를 이용할까 했지만 소문이 흉흉했다. 간 큰 일본상사 직원 둘이 육로로 이동하다가 베트콩에 납치돼 행방불명이 됐다는 얘기였다. 할 수 없이 수리를 마친 그 비행기를 타고 가슴을 졸이며 겨우 퀴농에 도착했다. 퀴농엔 엄청나게 값싸고 좋은 고철들이 나뒹굴었다. 현지인들은 고장난 장갑차와 군용트럭을 뭉텅뭉텅 잘라 고철로 내다팔았다. 퀴농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결과 회사에 3천t의 고철을 더 실어보냈다. 뿌듯했다. 사이공(호치민)으로 다시 돌아가 귀국하는 일만 남았다. 문제는 항공기 물색과 탑승. 죽어도 프로펠러기는 싫었다. 안전한 보잉 707기를 타려했지만 도무지 좌석을 예약할 수 없었다. 무작정 퀴농 비행장으로 향했다. 사방팔방 표를 구하러다녔지만 허사였다. 현지 한국인 안내인이 20달러짜리 두 장으로 공항직원을 구워 삶았다. 공항직원은 베트남인 부부를 강제로 내리게 했다. 물론 조사할 게 있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대신 그 자리에 우리를 태웠다. 뻔한 사정을 아는 베트남 사람들의 눈총을 받아가며 어렵사리 사이공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이공 공항은 베트남을 빠져나가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여기서도 뇌물을 먹이고서야 간신히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1975년 1월 30일이었다.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가족과 이웃집 주민들까지 나와 얼싸안고 난리가 났다. 납치돼 죽은 줄로 알았단다. 집에 와 신문을 뒤적이니 그럴만도 했다. 신문 1면이 연일 "월남 패망 임박","너도나도 베트남 탈출"이라는 헤드라인으로 장식돼 있었다. 내가 베트남에 머문 기간이 마침 미군 가족들과 외국인들이 이미 썰물처럼 월남을 빠져나오던 긴박한 시점이었던 것이다. 그 뒤 4월30일 베트남은 완전히 공산치하에 들어갔다. 베트남을 빠져나오지 못한 베트남 교포회장과 주베트남 한국공사가 포로로 잡혔다는 뉴스도 그 뒤를 이었다. 정리=김홍열 기자 com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