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지난 1997년 외환위기를 겪은 이후 정부 기업 금융 노사 등 각 부문에 걸쳐 구조개혁 작업에 박차를 가한지도 5년이 흘렀다. 사회 전반에 불어닥친 구조조정의 바람은 가계.기업.정부 모두에 커다란 고통을 주었지만 '효율'을 키워드로 한 체질 개선과 경쟁력 향상 등의 성과가 적지 않았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최근 서울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동아시아 경제.사회 분야의 세계적 석학으로 꼽히는 드와이트 퍼킨스 하버드대 교수, 이정우 경북대 교수, 임현진 서울대 교수를 만나 외환위기가 몰고 온 사회경제적 영향과 변화를 들어봤다. [ 참석자 ] 드와이트 퍼킨스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 이정우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임현진(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사회) ----------------------------------------------------------------- △ 임현진 교수 =한국 사회 안팎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이른바 '이중사회'가 되고 있다. 국제화된 개인.집단.계층과 그렇지 못한 그룹들 사이에 의식구조와 생활양식에서 뚜렷한 단층이 생기고 있다. 현 정부는 위기극복 과정에서 '통합정치'를 하지 못하고 지역 감정.이념 갈등.계층 대립을 악화시켰다. 한국 사회의 변화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 드와이트 퍼킨스 교수 =한국 경제는 대기업도 효율성이 떨어지면 몰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신속한 공적자금 투입으로 금융부문은 부실을 털어내고 합병과 통폐합으로 경쟁력 강화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이처럼 기업.금융.노동.공공 등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개혁이 추진된 점을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으로 정부 개입이 오히려 확대되고 있어 우려된다. △ 이정우 교수 =사회적으로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뚜렷해졌다. 부유층은 소득과 자산이 증가한 반면 빈곤층은 엄청난 규모의 빚을 짊어지고 살아가게 됐다. 빈곤층이 외환위기 이후 두 배로 늘었다. 빚을 내 경제위기를 넘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급한 불은 껐지만 늘어난 가계부채는 장차 큰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 임 교수 =외환위기로 이혼과 가출, 가정의 해체 등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다. 그 배경에는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많다. 한국 사회의 계층구조는 눈사람 모양이다. 소수의 상위계층과 다수의 하위계층으로 양분돼 있다. 이어 다수의 하위계층이 다시 상.중.하로 나뉘어지는 구조가 공고해지고 있다. 노숙자와 같은 언더 클래스(사회소외계층)의 등장을 눈여겨 봐야 한다. 정부의 적절한 개입과 기업 및 시민사회의 협조가 절실하다. △ 퍼킨스 교수 =세계화는 분명히 여러 국가에 도움을 줬다. 상품과 자금이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자원 활용의 효율성을 높였다. 누가 이익을 더 많이 보고, 누가 이익을 덜 봤느냐의 문제는 있을 수 있다. 세계화가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든 것은 아니다. △ 임 교수 =외환위기는 한국인들의 의식구조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개방화와 정보화로 특징지어지는 세계 경제의 명암을 몸소 체험케 했다. 세계화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고, 득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집단주의와 형식주의 대신에 개인주의와 실용주의가 우세해졌다. 금권주의와 물질주의가 확산되면서 공동체의식이 사라지고 있는게 현실이다. 한국인의 정체성이 약화되고 있는 점은 너무도 안타깝다. △ 이 교수 =기업 역시 많이 변했다. 기업 내부의 자의적인 결정을 차단하는 장치가 마련되고 있다. 개선돼야 할 점도 많이 남아 있다. 사외이사제도가 대표적인 사례다. 여전히 연고주의 인사가 대부분 기용돼 사외이사들이 거수기 노릇을 하고 있다. △ 임 교수 =대우나 현대건설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지배주주의 책임 문제는 여전히 정치적 타협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기업개혁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배경에는 정치개혁의 부진이 자리잡고 있다. 정경유착의 연결고리를 확실히 끊어놓지 못했다. △ 퍼킨스 교수 =최근 들어 한국 정부는 경제문제에 대해 경제적 접근보다는 정치적 해결책을 많이 사용했다. 기업파산 등 경제문제는 청와대가 혼자서 다루기에는 너무나 복잡해졌다. △ 이 교수 =경제발전의 수준이 높아지면 정부간섭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비효율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대중 정부가 '시장경제'를 표방한 것은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것이지만, 실천이 크게 모자랐다. △ 퍼킨스 교수 =한국이 외환위기를 신속히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리더십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정부가 시장경제를 부르짖으며 각 분야 구조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결과 정부의 입김이 오히려 커져버린 상황에 직면했다. 정부개입을 줄이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 임 교수 =한국은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대통령에 모든 권력이 집중된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 방식을 선택했다. 그 결과 국회가 정책 심의와 결정 과정에서 배제돼 민주주의는 후퇴했다고 평가한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일부 정치 및 사회세력이 권력과 자원을 독점하고 나머지를 배제하는 변질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이 교수 =노동부문도 개혁이 미진한 분야중 하나다. 구조개혁 초기의 정리해고 등은 이른바 '수량적 유연화'였다. 노동개혁을 뒷받침하는 제도적 개혁은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한게 현실이다. △ 임 교수 =현 정부가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산업평화 혹은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려고 한 일은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문제는 노사정위원회가 실질적 권한이 없었다는 것이다. 제도 자체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국회도 여야간 정파적 이해에 얽매여 노사정위원회의 결정사항을 기피한 책임이 크다. △ 퍼킨스 교수 =노동문제를 포함해 각종 경제문제에 대한 엄격한 법률적용을 촉구한다. 독립적인 사법시스템 구축이 절실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경제문제에 좀 더 많은 변호사들이 투입돼야 한다. 노사간 분쟁이 법률로 다뤄지도록 유도하자는 이야기다. 경제문제가 정치문제가 되는 순간 부패의 싹이 튼다. △ 이 교수 =사회안전망에 대한 점검도 필요하다. 고용 수준은 많이 회복됐지만 비정규직이 크게 증가했다는 것은 장기적으로 한국 경제의 불안요인으로 등장할 것이다. 외국의 비정규직들은 자신에게 편리한, 이른바 '유연한 파트타임' 제도의 혜택을 보고 있는데 비해 한국에서는 상용직과 하루종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임시직.일용직.파견직이란 이름으로 차별을 받는다. △ 임 교수 =경제 성장과 평등을 동시에 실현하기가 매우 어려운 시대다. 더욱이 세계화는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내건 참여 및 분배의 논리와 서로 상반될 수 밖에 없다. 체제의 효율성을 높이되 적극적인 복지정책과 정치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 △ 퍼킨스 교수 =무엇보다 교육제도의 개혁을 강조하고 싶다. 학급당 학생 수가 여전히 많고, 경직된 수업내용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교육 받을 기회가 공정히 제공되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아울러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가 경제운영의 근본틀을 흔들어놓지 않도록 모두가 신경을 써야 한다. 경제 관료들을 수시로 갈아치우는 일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시장에 혼란을 주기 때문이다. 정리=유영석 기자 yoo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