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장을 가득 메운 붉은 악마들이 미국의 성조기를 위로 걷어올린다. 성조기가 빠진 자리에 거대한 태극기가 등장한다. 그리고 곧 이어 짙은 고딕체의 광고 자막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이번엔 미국입니다." 이는 SK텔레콤이 10일 펼쳐질 한국-미국전에서 한국의 승리를 기원하며 내보내고 있는 광고 장면이다. 이 광고는 우리나라 광고 사상 처음으로 미국을 직접 타깃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광고계 안팎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금까지 미국은 '절대' 맞설 수 없는 나라로 통했던 게 사실. 사회 현상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광고계에서도 미국을 광고 소재로 삼는 것은 '발칙한 상상'으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월드컵은 이같은 금기(禁忌)를 한번에 무너뜨렸다. 월드컵이 깨뜨린 터부는 이뿐만 아니다. 월드컵 응원을 계기로 그동안 만지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던 태극기가 어느새 생활 속으로 파고들었다. 페이스 페인팅으로 뺨 위에 올라온 태극기는 이제 더 이상 특별한 볼거리가 아니다. 경기장에선 태극기를 치마처럼 두른 젊은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고 배꼽티를 입은 여성들이 태극무늬를 배에다 그린 모습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80년대라면 '국기 모독죄'로 걸렸음직한 모습이다. 빨간 색을 이용한 '레드(red) 마케팅' 붐도 마찬가지다. 냉전시절 붉은 색은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색으로 여겨져 환대받지 못했다. 심지어 '레드 콤플렉스'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월드컵은 붉은 색에 대한 이미지를 확 바꿔 놓았다. 응원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붉은 색을 이용한 광고와 제품이 물밀듯 쏟아지고 있다. 심지어 붉은 악마들의 모습이 전파를 타고 세계 곳곳으로 알려지면서 빨간 색은 한국을 대표하는 색으로까지 인식되고 있다. 김미리 기자 miri@hankyung.com